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10)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하나님은 만물을 사랑하시되 피조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으로 여겨 사랑하십니다.

 

몇 해 전이던가. 산과 들에 녹음이 우거질 무렵, 교우 가정에 초상이 났다. 나는 장례식 주례를 부탁받고 꽤 먼 거리였지만 교우 가정의 선산까지 따라갔다. 하관식을 마치고 작은 산등성이로 허위허위 올라가 둥근 봉분 만드는 걸 내려다보며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귀밑머리가 하얀 교우가 다가와 이파리가 딱 두 잎 달린 어린 단풍나무 한 그루를 쑥 내밀었다. 하관식을 하는 동안 산을 돌아다니다가 캤는데, 집에 가져가서 화분에 심어서 키워보라고! 그러면서 교우는, 이미 작고한 자기 모친에게 들었다며 어린 단풍나무에 얽힌 이야기 한 자락을 풀어놓았다.

깊은 산을 돌아다니다 보면, 한 군데 소복하게 돋아난 단풍나무들을 볼 수 있단다. 다람쥐가 한 짓이라고. 늦가을이 되면 다람쥐들은 겨울양식을 준비하는데, 더러는 단풍 씨앗들을 물어다 저만 아는 곳에 묻어두기도 한다. 그런데 기억력이 신통치 않은 다람쥐란 녀석, 씨앗 묻어둔 곳을 표시해두기 위해 슬쩍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드높은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 단풍 씨앗을 감춰둔 곳과 수직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에다가 그 위치를 표시해 둔다.

하지만 반들거리는 다람쥐의 염주 같은 눈과 눈을 맞춘 구름은 이내 녀석의 눈빛을 망각 속으로 아득히 흘려보내고 만다. 겨울이 다가와 먹을 것이 궁해진 다람쥐는 가을에 저장해 놓은 단풍 씨앗을 찾으려 해도 제 눈으로 점찍어 둔 구름은 이미 흘러가 버렸으니, 결국 단풍 씨앗을 찾아내지 못하고 만다. 그런데 그렇게 다람쥐가 찾아내지 못한 단풍 씨앗들은 봄이 되면 싹을 틔워 나무들을 지상으로 소복하게 밀어 올린다.

교우는 여기까지 신바람이 나서 이야기를 풀어낸 다음,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겠지만, 참 그럴 듯 하잖아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다람쥐가 자기 소유를 구름에다 등기해 둔다는 발상이 참 재미있는 것 같아요. 또 그런 다람쥐의 어리숙함이 단풍나무를 돋아나게 한다는 것도 그렇구요!”

나는 교우의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좋은 이야기를 들려줘서 고맙다는 말만 하고 더 이상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교우의 말마따나 지어낸 이야기일망정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또한 나를 부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교우가 비닐봉지에 담아준 단풍나무를 들고 산을 내려오며 나는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내 삶의 거울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가끔씩 교우가 들려준 그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뭐든 쌓아둘 것이 있으면 붉은 인주에 도장을 찍어 등기해 두듯 사나운 욕심이 솟구칠 때, 그런 멈출 줄 모르는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연인’인 지구생명들을 미치게 만들고 떼죽음으로 몰아넣는 파렴치를 마주할 때, 가을하늘처럼 맑고 투명한 그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인간 생명이 소중한 만큼 소, 닭, 오리… 같은 종의 생명 또한 공경 받아 마땅한 생명이 아니던가. 오직 번쩍이는 금화로만 환산되던 생명들이 땅 위에서 사라지면, 인간은 금화를 먹고 살 수 있을 것인가.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생명이 생명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누군가는 창조주의 비애라고 했지만, 좀 덜 먹고 더 많이 존재할 수는 없단 말인가. 좀 덜 갖고 서로 나누어 더불어 사는 기쁨을 누릴 수는 없단 말인가. 생각할 줄 아는 존재라면, 인간 종자가 이대로 살 때, 이 지구별에 새가 날지 않고, 꽃이 피지 않고, 강물이 흐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세상에 중요한 일들이 많지만, 꽃이 피고 새가 울고 강물이 흐르는 일보다 중요한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오늘 아침에도 화분에서 제법 자란, 오래 전에 교우가 캐준 단풍나무를 보며 인도의 한 구루가 던져준 만트라를 중얼거렸다. 소훔(sohum)-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그렇다. 지구생명들은 내 마음대로 처분 가능한 ‘그것’(It)이 아니다. 존중 받아 마땅한 ‘그대’(Thou)다. 소, 닭, 오리, 물고기, 미생물, 바이러스, 자갈, 바위 같은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공경 받아 마땅한 그대다.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다. 그렇다. 그대가 있어 내가 있다!

기쁨아아 ―

 

내가 사막에 있어 두려움을 느낀다면,

나는 한 아이가 나와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는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합니다.

나와 함께 있어 줄 아이가 없다면,

나는 적어도 한 마리의 동물을 데리고 가서 위로를 받겠습니다.

 

아래층에 사는 아낙은 독실한 가톨릭 교인이다. 집 뜰의 가장자리에 석고로 만든 성모 마리아상을 모셔놓고 틈만 나면 그 앞에 두 손을 모으고 비나리하곤 한다. 그리고 성모상 앞에는 꽃이 핀 화분들을 틈틈이 사다가 놓는다. 어버이날 오후에 보니, 또 안 보이던 화분이 성모상 앞에 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카네이션 화분이었다. 그래, 성모님이야말로 아낙에겐 ‘참 어머니’가 아니던가.

아낙은 성모상뿐만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개에도 평소에 남다른 애정을 쏟는다.

개는 모두 세 마리인데, 집 안에서 키우는 애완견은 ‘가을이’, 마당에 묶어 놓고 키우는 늙은 진돗개는 ‘복실이’, 그리고 늘 풀어놓고 기르는 덩치 큰 개도 한 마리가 있다. 그 동안 나는 그 개의 이름도 모르고 두 해를 지났다. 꼭 늑대처럼 사납게 생긴 그 개를 나는 그냥 ‘늑대’라고 부르곤 했다. 사실 늑대는 제 집도 없이 동네를 배회하는 떠돌이 개였는데, 아낙이 이 집으로 이사 온 후 잘 거두어주어 한 집 식구가 되었다. 그러니까 ‘업둥이’ 개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래층 아낙이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기쁨아아- 기쁨아아아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누가 왔나? 그래서 얼른 베란다로 나가 내려다보니, 아낙은, 글쎄, 울 밖에 어슬렁거리는 그 사납게 생긴 늑대를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기쁨아아아-”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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