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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엄마, 내가 끝까지 지켜볼꺼야"

by 한종호 2020. 7. 30.

신동숙의 글밭(202)


"엄마, 내가 끝까지 지켜볼꺼야"


오후에 갑자기 빗줄기가 거세지는가 싶더니 전화가 걸려옵니다. 합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아들입니다. 지난 겨울 방학부터 코로나19로 반년을 집에서 거의 은둔 생활을 해 오던 아들이, 그립던 친구들을 다시 만나기 시작한 건 초여름인 6월 중순입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학교와 함께 푹 쉬었던 학원들과 학습에도 다시 시동을 걸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 들어 매일 아침이면 거울 앞에서 머리 모양과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마지막에 마스크를 쓰고서 등교 준비를 하는 아들의 낯선 모습이, 이제는 제법 익숙해지고 있습니다.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이유는 비가 세차게 내리니, 집에 있는 복싱 가방을 가지고 중간 지점인 학교 앞으로 와 달라는 얘기입니다. 집에 들렀다가는 복싱 학원 차를 놓칠 수도 있으니, 엄마가 데리러 와 달라는 얘기입니다. 비폭력 평화를 사랑하는 엄마의 바램은 복싱 학원 차를 영영 놓쳐서 아예 가지 않게 되는 일이지만, 아들에겐 아빠와 함께 스스로에게 한 약속을 져버릴 수 없는 입장이 있다는 걸 엄마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들의 하루 일과가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마치면 하루에 두 군데 운동 학원을 가야 하기에, 늘 그래왔듯이 학습 학원에 대한 부담은 최소한으로 줄여주기 위해 엄마도 억지로 공부를 하라고 쪼으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걱정을 해 주는 건 고맙게도 아들의 친구 엄마입니다. 학업에 무심해 보이지만 그런 제 마음 속에선 늘 신경을 쓰고 있는 공부가 있습니다. 학업보다는 마음을 밝혀줄 동양 경전과 하나님을 알아갈 성경 읽기입니다. 


그런데 한 가족이라곤 해도 다들 뜻이 달라서, 그런 제 뜻대로 되지 않기에 속으로만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그 옛날 어린 손주가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한학을 공부했다는, 멀리서 들려오는 옛이야기가 저에게는 늘 그리운 사람이 사는 집과 마을의 풍경입니다. 다만 기도하며 깨어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뿐입니다.



아들의 친구 엄마는 합기도를 운영하시는 관장님의 부인이자 운동 선생님이자 세 아들을 둔 바쁜 직장맘입니다. 그 중에 둘째 아들과 우리 아들은 오래된 단짝 친구입니다. 운동 선생님이자 친구 엄마는 우리 아들 예성이의 주중 시간표를 대략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성이의 수학 연산을 걱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세 아들들은 합기도장에 딸린 사무실이자 작은 방에서 수학 연산 학습지를 꾸준히 해 오고 있는 중입니다. 


괜찮다면 수학 학습지 선생님이 애살도 있고 잘 가르치신다며, 생각이 있으면 소개를 해줄까 하십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관할 지역이 달라서 안 된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운동 선생님이자 친구 엄마가 나서서 그러면 합기도에서 하는 걸로 하자며 학습지 선생님과 얘기를 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합기도 운동 선생님에겐 매일 오후마다 수학 연산 학습지를 풀라며, 한 마디를 해야 할 아들이 셋에서 넷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어쩌다가 저는 한 짐 덜고, 한시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제게 주어진 시간 만큼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해야 하는데, 깜빡 낮잠이나 자고 있으니 염치가 없고, 제게 내려주시는 은총이 차고도 넘침을 봅니다. 처음엔 사양할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혼자서 푸는 학습지보다는 친구가 옆에서 같이 풀면 서로가 심심하지 않아 오히려 서로에게 좋을 것 같다는 한 생각을 붙잡은 것입니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검정색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아들이 검정색 우산을 들고 저만치서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뒷좌석에 앉자마자 "아씨~" 콧등에 얹는 안경 꼭지가 다시 떨어졌다며 투덜대면서 보여줍니다. 어젯밤에 안경 꼭지 고무가 떨어진 걸 보고 임시방편으로 강력 접착제로 붙여주었더니, 방금 차에 오르기 직전에 다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래도 이만치라도 견뎌준 고무 꼭지에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대로 쓰고서 운동을 했다가는 피부를 찌를 것 같습니다. 


동네에는 안경점이 한 군데 있습니다. 아들에게 5천원을 주면서, 큰 도로에 차를 세울 수도 없고, 엄마랑 같이 가려고 먼 곳에 주차를 하게 되면 복싱 학원차를 놓칠 수도 있으니, 혼자서 안경점을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합니다. 평소 같으면 혼자서 못 들어간다며 떼라도 썼을 텐데, 아들은 급하기도 했거니와 부쩍 올라간 키 만큼 마음도 자란 거 같아서 흐뭇한 마음으로 운전대를 부드럽게 돌립니다.


골목을 한바퀴 돌아서 나오는데 때마침 검정색 우산을 든 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차 뒷좌석에 털썩 앉은 아들의 입에선 "아씨~" 하며 새어 나오는 소리가 쇳소리 같아, 언제나 엄마 귀에 거슬려도 표정은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복싱차가 오기까지 10분 정도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평소에 날씨가 좋을 때 같으면 잠시 기다리라며 내려주었을 텐데, 빗줄기가 세찬 바람에 잠시 차에서 쉬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어제 새로 받은 합기도 도복 얘기를 꺼냈습니다. 선생님이 예성이 오랜만에 왔다고 도복값을 받지 않고 선물로 주시겠다는데, 얘기를 이어가려니, 뒷좌석에 사장님처럼 앉은 아들이 잠시 생각하는가 싶더니, "안돼! 아씨~ 그러면 안 되지." 합니다.


엄마의 얘기가 이어집니다. "나중에 진욱이랑 민욱이 형아랑 원욱이가 우리집에 놀러 오면, 올 때마다 엄마가 맛있는 간식 해 주면 안될까? 선생님이 도복값을 받지 않고 선물로 주고 싶다고 하시는데" 했더니, 아들의 입에선 "그건 그거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 거고, 도복값은 꼭 드려!" 합니다. 그러면서 잠시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다시 사장님처럼 기대앉으며, "도복값 꼭 드려야 돼~ 엄마, 주는지 안 주는지 내가 끝까지 지켜볼꺼야." 아들은 작은 소리로 은근히 근엄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아들 생각이 그러면 그렇게 하자고 했더니, 무거운 몸을 틀면서 "그리고 내가 그랬다고 절대로 말하면 안돼! 아씨~ 내가 그랬다고 말하기만 해봐~ 아씨~ 부끄럽게." 그러면서 저 혼자 먼 데를 보는지 고개를 돌리며, 비가 쏟아져 내리는 창밖을 보는 듯 퉁하게 있습니다.


아들의 입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그런 말들이 엄마 귀에는 꼭 예수님의 음성처럼 들려옵니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하시던 말씀이 그렇고, 혈우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후 병이 나은 것을 보시며, '내가 했다'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하신 예수의 마음을 곰곰이 헤아리다 보면, 어둡던 가슴에 등불을 켠 듯 햇살을 비추는 듯 따뜻해지고 환해져옵니다. 


그 먼 옛날 그 모든 이적과 기적을 행하시는 중에도 신약 성경의 단 한 소절도 '내가 했다.'며 스스로에게 의를 돌리신 적이 없으신 예수입니다. 저는 언제나 예수의 온전히 낮아진 그 마음 앞에 그만 주저앉습니다. 그 겸손함과 사랑으로 온전한 진리의 몸이 되신 예수의 말씀을 오늘 아들에게서 살짝 엿들은 것입니다. 


아들의 입에서 '아씨~'를 연발하게 만들고, 몸과 마음을 눅눅하게 만드는 세찬 빗줄기 조차 메마른 심령에 내려주시는 시원한 복음의 말씀 같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햇살처럼 제 무딘 가슴까지 환하게 비추는 빛줄기 같습니다. 아들의 입에서 나온 "엄마, 내가 끝까지 지켜볼꺼야."라는 말처럼 가슴 선들한 말씀이 또 있을까요. 이 세상 끝까지 챙기려고 온종일 내려주시는 빗줄기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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