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음의 신비

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10)

들음의 신비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성취한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습니다…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없는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우리의 수용력에다 두셨습니다.

 

여기서 ‘수용력’이란 우리의 ‘귀’의 기능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의 길잡이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우리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한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 속에서 더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각 덕택이 아니라 청각 덕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보는 행위가 내게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면, 영원한 말씀을 듣는 사건은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눈’이 공격적이고 세계 안으로 뚫고 들어가는 감각기관이라면, ‘귀’는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감각기관이다. 지혜자로 알려진 솔로몬 왕은 하나님께 장수나 부귀나 명예보다 오히려 지혜를 구했는데,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얻는 것이다. 현자들의 경구를 모아놓은 성경의 지혜문학을 연구한 한 신학자는 ‘인간의 인간다움은 듣는 것에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성서를 보면, 솔로몬뿐만 아니라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등의 모든 진실한 구도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즐겼다.

예수 또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지만, 늘 ‘무한’(無限)에 귀 기울이며 무한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살았기에 그처럼 위대한 사랑의 화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의 성녀로 불리는 마더 데레사 수녀가 살아 있을 때 어느 기자가 수녀를 만나 질문을 던졌다.

“수녀님은 무어라고 기도하십니까?”

그 질문에 수녀는 조용히 머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저는 듣습니다.”

기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그러면 수녀님이 들을 때, 하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분도 들으십니다.”

 

나는 바로 그대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신적인 존재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소위 겸손이라는 덕은 신성의 터에 뿌리 내리고 있습니다.

신성의 터에는 겸손이라는 덕이 심어져 있습니다.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겸손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엑카르트가 말하는 겸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존중해야 할 남이 따로 있지 않고, 내세울 자기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너와 나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에, 너가 곧 나다.

우파니샤드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대가 누구인가’ 물을 때 ‘나는 바로 그대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자는, 그 순간 온갖 속박에서 풀려난다.”(<까우쉬따끼 우파니샤드>)

온갖 속박에서 풀려났다면, 그는 이원성에서 자유로워진 존재이다. 우리가 삶에서 겪는 속박의 고통은 나와 너,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이원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으뜸의 가르침[종교]을 따른다는 이들조차 그 가르침을 나누지 않던가. 내가 믿는 종교가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다른 종교인을 내치는 사람, 그는 그 이원적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으뜸의 가르침을 따른다면서도 ‘울타리’를 친다면, 그는 아직 으뜸의 가르침에서 멀다. 울타리를 치며 사는 자가 있다면, 그 울타리는 곧 그를 가둘 것이다. 스스로 울타리를 걷어낼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속박 없는 자유인의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진정한 겸손의 덕을 갖춘 사람은 어떤 울타리도 치지 않는다. 자기 안에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수피 시인 젤라루딘 루미의 노래에 귀를 기울여보자.

낙원도 지옥도 내 거처가 아니다.

에덴에서도 리즈완에서도 타락하지 않았고

아담의 혈통을 물려받지 않았다.

장소 없음이 내 장소요

발자취 없음이 내 발자취다.

나는 사랑받는 이의 영에 속한 까닭에

이것은 몸도 아니고 영도 아니다.

나는 이원성을 던져 버렸고

두 세계가 하나임을 알아버렸다.

하나는 나를 찾고

하나는 나를 알고

하나는 나를 보고

하나는 나를 부른다.

-P. B. 이나야트 한,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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