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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햇살이 반가운 골방

by 한종호 2020. 4. 27.

신동숙의 글밭(138)


햇살이 반가운 골방


아침 설거지를 마친 후 산책 준비를 하러 방으로 들었습니다. 작은 창으로 드는 한 줄기 햇살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해가 뜨는 아침에도 빛줄기가 들지 않는 구석진 방이 제 방입니다. 잠시 비추다 사라질 좁다란 햇살이라도 그저 반가운 골방이라서, 집밖에선 흔한 햇살이 골방에서는 환하게 피워서 안겨 주시는 꽃다발 같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20대에 읽은 후 지금껏 제 삶에 영향을 준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무리 좁은 골방에 쪽창이라도, 밖으로 보이는 한 조각의 하늘과 한 줄기의 햇살에도 고마워할 수 있는, 너른 마음을 어느 한 구석에 보석처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색과 기도는 그 어디서든 감옥일지라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깨우침입니다.


침대 위로 내린 햇살이 누운건지 앉은건지, 머릿속으로 실없는 생각이 봄바람처럼 스치다가, 한낮에 잠시나마 골방까지 찾아들어온 햇살이 고맙고 순간 애틋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옆집의 회색벽 뿐인데, 어디에 해가 있나 싶어 빛을 따라 올려다보았습니다. 저 높이 길고 좁다란 하늘 위에, 여기 있다며 해가 반짝합니다. 얼마 전에 아들과 방을 바꾸었더니, 오래된 집이라도 새집에 새방 같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방을 바꾸어야 할 때가 오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가구 배치를 바꾸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혼자서 옮겨야 할 때면, 가구를 들어서 옮기는 게 힘에 부쳐서 온몸으로 밀고 당기며 힘겹게 옮기게 됩니다. 그렇게 같이 세월이 흐른 집이라 나무로 된 마루에는 긴 생채기가 나기도 하고 더러는 찍힌 자국도 있습니다. 그래도 지나온 삶의 흔적이라 여기면 그리 밉지만은 않습니다. 





갈아입으려던 옷 그대로 입은 채, 햇살에 등을 세우고 앉아서 가만 눈을 감습니다. 들려오는 소리가 바람결인지 고르는 제 숨결인지 더듬으며, 또 다시 태초의 어둠과 혼돈 속인 듯 헤매이다가 차츰 마음이 한 점에 머무는 순간이 옵니다.


알을 품듯 가슴으로 들어온 얼굴 하나를 품습니다. 고요히 품고 있노라면 어둡던 가슴에도 해가 뜹니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둔 가슴 저 낮은 곳으로부터 따뜻해져 오는 것입니다. 평온한 순간입니다.


잠시 고요한가 싶더니 갑자기 건넌방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닥치듯 달려오는 바람소리에, 내 안의 평온이 한 순간 깨집니다. 앉았는 침대 위로 털썩 딸아이가 앉습니다. 요즘 온라인 등교로 집안에서 오래 생활하게 된 딸아이는 네살 때 하던 미운짓을 능청스럽게도 해댑니다.


아침밥을 먹자며 방에서 나오라고 할 때는 엄마 진을 다 뺄 만큼 꿈쩍도 않던 바윗돌이더니, 단단하던 마음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참새처럼 제비처럼 날아들어서 평온을 깹니다. 


하는 폼이 얄밉기도 하고 조그만 입이 귀엽기도 해서, 엄마랑 같이 앉았자고 했더니, 뭐라 뭐라 지저귀면서 날아가고 없습니다. 잠시 들었다 사라지는 햇살처럼 고요한 순간은 언제나 이렇게 오래 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루를 살아가다가 잠시 잠깐 머물러 마주한 그 고요한 마음에 깃드는 온기 한 다발이면 또 하루를 넉넉히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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