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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소나무와 차나무

by 한종호 2020. 4. 21.

신동숙의 글밭(134)


소나무와 차나무


강변 둑으로 어린 쑥이 봄 햇살에 은빛으로 살랑이던 2월의 어느 날. 4살 딸아이의 조막손을 잡고 찾아간 곳은 다도원茶道院입니다. 그날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가 되면 한 손엔 앵통(차 바구니)을 한 손엔 딸아이의 손을 잡고서 차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예다법이 제 몸에 익숙했던 건 어려서부터 귓전에 울리는 일명 부모님의 잔소리,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껏 귓전을 따라다니는 부모님의 음성인 터라 형님들은 처음인데도 잘한다며 이뻐해 주셨고요. 제 나이 32살 무렵이라 다들 저한테는 어머니나 이모 연배셨기에, 선생님이 애초에 저보고 형님이라 부르라 하시며 미리 호칭을 정해 주셨던 것입니다. 언니도 아니고 이모도 아닌 그 형님이라는 호칭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말을 잘 따르는 제 성격에 그리고 무슨 일이든 서너 번만 하면 익숙해지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일이든 마음이든 한 마음 먹기가 저에겐 영원의 숙제로까지 다가오는 것입니다. 시작보다 되돌리는 일이 더 무겁기 때문입니다.


다도원 맞은 편으로는 선생님께서 손수 가꾸시는 차밭이 있었습니다. 허리 높이의 년 수가 오래지 않은 차나무 고랑 사이로 비닐 천막천이 깔려져 덮여 있는 모습이 제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것입니다. 비만 오면 무성히 올라오는 잡초를 감당치 못해 그리하셨다며 얘기를 꺼내시는 선생님의 표정도 가볍지 못했답니다. 찻잎이 갈색 붉은빛을 띈 연유를 여쭈니, 겨울 동안 냉해를 입어서 그렇다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차나무의 잡초와 냉해가 저에겐 숙제로 다가왔답니다. 선생님이 내주신 적 없는 혼자만의 숙제인 것입니다.


쑥이 제법 키가 오르고, 형님들은 여기저기 쑥을 캐러 가신답니다. 쑥을 많게는 쌀 푸대 자루 한가득 담아서 방앗간으로 가지고 가면 쑥찰떡이나 쑥설기를 해서 가족과 지인들과 나누어 드시기도 하고요. 그러고도 남는 것은 냉동고에 넣어 두었다가 일년 내내 녹여서 드시는 재미가 솔솔하다며 쑥캐러들 가십니다. 


하지만 제 시선을 끄는 것은 이맘때 4월 곡우 무렵의 차밭에 오르는 어린 찻잎입니다. 세작(새의 혀)이 연둣빛으로 제 연한 가슴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 연하고 푸른 어린 찻잎이 가슴으로 들어오는데, 그날부터 잠자리에 누우면 떠오르는 얼굴이 되었답니다. 왜 그런지 제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한 마음이 일기보다는 그냥 좋은 것입니다. 그 마음 안에서 설레기도 하고 혼자서 충분히 행복한 것입니다.



책을 뒤졌습니다. 차나무의 생장 환경, 차나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차나무에 대한 자료라면 두루두루 살펴보았습니다. 다실과 선생님의 차밭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서 동洞에서 운영하는 작은 주말 농장이 있어요. 텃밭을 따라서 차밭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텃밭 너머로 산자락이 비스듬히 따라옵니다. 산에는 소나무가 산을 지키고 서 있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한국의 산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사철나무가 바로 차나무였던 것입니다. 통일신라시대 서라벌의 왕에게 진상하던 차 제배 마을, 제가 사는 마을은 차마을이었던 것입니다. 릴케의 말처럼 차와 닿은 우연한 인연이 필연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선생님의 차밭은 비가 오던 날을 잡아서, 지리산에서 차 모종을 조심스레 공수를 해오셔서 심고 가꾸시는 노지의 차밭인 것입니다. 그동안 책을 뒤지며 고민하던 잡초와 냉해 숙제가 눈 앞에서 해결 되던 순간입니다. 목장갑을 끼고 쭈글쭈글한 쌀 푸대 자루를 챙겨서 소나무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전엔 예사로 보았던 소나무 아래는 솔갈비로 비옥한 옥토밭입니다. 솔갈비를 긁어 모으는 손끝에서부터 솔향이 피어올라 가슴을 맑게 씻겨 줍니다. 저는 꾸미지 않은 소나무가 좋습니다. 그리고 소나무를 닮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떨어져 있더래도 만난 적 없더래도 가슴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맑은 솔바람에 솔향이 전해져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내려올 때는 불룩해진 푸대자루를 끌고서 내려왔습니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부자가 된 마음으로 겨우 겨우 한발짝씩 떼어 놓으며 선생님의 차밭까지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무거운 천막천을 걷어낸 자리에는 지렁이와 작은 지네들이 날벼락을 맞은 듯 화들짝 놀라서 몸을 비틀며 어쩔 줄을 몰라하고, 내려다보는 저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라 미안한 마음에 잠시 멍해지던 순간입니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차나무 아래로, 긁어온 솔갈비를 흩뿌려줄 때의 마음은 짠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요. 하나님이 세상에 비를 흩뿌려 주실 때의 마음도 이런 마음일까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100여 평 되는 차밭 전체에 솔갈비를 두둑하게 깔아주는 일은 한동안 계속된 제 하루의 소중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혼자서 행복한 시간입니다. 타지역으로 출강이 잦으셨던 선생님이셨기에 오롯이 저 혼자만의 시간이 되었답니다. 참, 딸아이를 또 깜빡할 뻔 했네요. 그때처럼요. 심심한 딸아이를 하나님이 좀 데리고 놀아 주셨으면 하는 마음, 마음 한 구석엔 그런 마음 한 조각 품었더랬습니다. 엄마 곁을 한시도 떨어진 적 없는 딸아이가 호젓한 시간 동안 하늘을 보고 흙도 보고 꽃도 보면서 어린 마음이 자연으로 물들어가기를요. 


비가 오는 날, 흐린 날은 찻잎을 따지 않고, 밤에도 따지 않습니다. 이슬 머금은 아침 나절에 따는 찻잎이 싱그럽지만 저는 아침을 먹은 후 천천히 집을 나섭니다. 주로 정오를 전후로 해서 찻잎을 땄습니다. 연둣빛 찻잎을 받친 떡잎과 줄기를 오체라고 하고요. 깨알만한 오체라도 섞이면 전체 차맛을 헤친다고 합니다. 나중에 골라내는 수고를 덜기 위해서라도 찻잎을 따는 그 순간에 집중을 하기로 했습니다. 세작과 두 잎까지만 세심한 손끝으로 찻잎을 따기로 마음을 먹고 시작한 찻잎따기입니다. 딸아이는 저도 엄마를 따라서 찻잎을 따다가 나중에는 지겨운지 멀찍이 앉아서 노는 모습을 스치듯 보고는 계속 찻잎을 땄습니다. 그렇게 대여섯 시간이 흐른 줄도 모르고서.


그 다음날부터 딸아이는 차밭 입구에서부터 땅바닥에 드러누워 두 다리를 구르며 공중 자전거를 탔습니다. 놀아주던 엄마를 차나무한테 빼앗긴 것이 억울한 것인지 답답하기만 한데. 그런 와중에도 제 마음엔 온통 찻잎을 따서 덖을 생각에 마음은 구름처럼 부풀어 있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누으면 온통 푸릇푸릇 연둣빛 찻잎이 가득한데 딸아이의 마음은 온통 먹구름인지 잔뜩 찌푸린 얼굴로 눈물까지 흩뿌립니다. 미안한 마음이 강 운무처럼 자욱해지던 날입니다. 


십 년이 지난 이제까지도 저에게서 연둣빛 푸릇한 향이 난다면 아마도 그것은 그때 어린 찻잎에 물이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제 손끝에서도 그때 찻잎을 따던 그 설레임으로 푸릇푸릇합니다. 아름다운 추억은 세월이 갈수록 시간에 닦여서 점점 더 빛나는 보석별이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강바람을 등지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서 부탄가스에 불을 켭니다. 그 위에 작은 무쇠 가마솥을 올려 뜨겁게 달굽니다. 깨끗한 목장갑을 낀 손으로 빠르게 덖어서 찻잎에 센 열을 가합니다. 첫불에 달군 차향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푸른향 너머로 단향과 구수한 차향. 만약 향에도 길이 있어서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면 본향에 닿을 것만 같은 차향은 아련한 그리움입니다.


솔갈비를 깔아주는 숙제를 다 마치고도 선생님의 노지 차밭을 볼 때면 아쉬운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바로 옆 산으로 야생 차나무를 품어 안듯이 지키고 선 소나무들의 듬직한 모습 때문입니다. 강바람이 매서운 한 겨울날에도 소나무 아래 차나무는 냉해를 입지를 않으니까요. 소나무 아래 산비탈에서 일년 내내 강 운무를 가득 머금은 찻잎에는 윤기가 돕니다.


하나의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고 돌의 냉기를 먹고 자라는 차나무. 비옥하지만 무른 흙밭에선 그 뿌리가 녹아서 살 수가 없다고 하는 차나무. 대개의 식물들이 비옥한 흙밭에 뿌리를 내려 제 몸에 살을 찌우는 삶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삶입니다. 늦가을에서 겨울 동안 하얀 차꽃을 피워 알싸한 향을 풍기는 차나무는 어디를 보나 차갑고도 고독한 식물입니다. 


그런 차나무에게는 소나무 만큼 좋은 사우師友도 없는 것입니다. 차나무에게 소나무는 매서운 강바람으로부터 냉해를 막아줍니다. 차나무는 소나무를 우러러 보며 일년 내내 늘 푸른 맑은 미소를 잃지 않고요. 차가운 겨울엔 온몸으로 시를 쓰며 푸른 바람 노래를 함께 부를 소나무와 차나무. 그리고 제가 선 자리에서 때가 되면 저절로 떨군 솔잎으로 차나무의 잡초도 막아주고, 좋은 양분까지 되어주니 서로에게 이보다 더 좋은 만남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도 만남이 있다면 소나무와 차나무 같은 푸른 만남이 귀할 것입니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맑고 좋은 손길을 만나면 차는 최상품의 차가 됩니다. 사람에게도 그런 좋은 차와 좋은 책과 좋은 벗과 좋은 스승과의 행복한 만남이 있습니다. 또한 스승이면서 벗인 사우師友와의 만남이 더없이 소중하고요. 그런 두 개의 샘물과 샘물이 서로 만나서 함께 흘러 생명을 살리는 강물이 되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저에게 그런 맑은 벗이란 자연을 좋아하고 진리를 등불 삼아서 자비와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문득 드는 느낌이 있어요. 그런 마음을 간직하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의 몸엔 유독 힘을 잔뜩 빼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답니다. 저는 그렇게 온몸에 힘을 빼고 있는 사람 앞에선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이올린 명장 마틴 슐레스케가 얘기하는 하나님의 공명체가 된다는 것. 그런 공명체가 되는 맑고 푸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선 어린 찻잎 앞에 섰을 때처럼 순하고 연한 여린 떨림이 가슴으로 전해져 내 안에 울리는 듯합니다. 상대로부터 내 마음 거울에 비친 그 마음을 관통해서, 그 마음과 의식의 뿌리가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헤아리는 시간은 고요합니다. 자연을 닮은, 예수의 성품을 닮은 영혼 앞에선 저는 한 잎의 연한 잎사귀가 되어 때론 물방울이 되어 흔들리는 것입니다.


찻잎은 구증구포(九蒸九曝). 아홉 번 열을 가하고, 아홉 번 손으로 비벼야 비로소 까실한 차茶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 김 식힌 따뜻한 물을 만나야 비로소 푸르고 구수한 아득한 그리움의 차향을 머금은 한 잔의 차가 됩니다. 옛부터 책을 벗 삼은 선비들의 벗이 되어주던 고마운 차茶. 피를 맑게 하고 정신을 깨워주는 한 잔의 차茶. 여전히 그 끝에 닿은 적 없는 그리움의 차향을 따라서 이 4월의 봄날에도 하늘은 환하게 푸르고 맑고 끝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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