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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남동생은 의리, 누나는 정의, 가정엔 평화를

by 한종호 2020. 4. 19.

신동숙의 글밭(132)


남동생은 의리, 누나는 정의, 가정엔 평화를


여야의 거센 돌풍 속에서 21대 총선을 치른 후 이전보다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결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지도상으로는 파란색이 더 많이 보였기에 그래도 한국은 희망이 있습니다. 선거 전에 울산의 어느 시장 상인의 인터뷰에서 "나라를 팔아 먹어도 저는 새누리당이예요."라고 해서 파문을 일으킨 곳이, 바로 제가 살고 있는 마을입니다. 처음엔 상인의 말에 저 역시 참 기가 찬다 싶었습니다. 어리석어도 그 만큼 어리석을까 싶은 답답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살고 있는 울산은 다른 세상, 이상한 나라가 아니라 평범하고 선한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마을입니다.


총선 전날 부산에 살고 있는 남동생의 네 식구가 울산으로 놀러왔습니다. 누나 곁에 살고 있는 엄마댁을 찾은 것입니다. 남동생은 매형을 보며 반갑게 악수를 하더니, 걸어 오는 폼과 얼굴이 윤석열 검찰 총장을 닮았다며 함박웃음을 짓습니다. 코로나19로 수영장이 문을 닫으면서 남편은 살이 제법 찐 것입니다. 처남의 말에 남편은 웃기만 합니다. 내심 식은 땀이 날 거 같은 남편에게 희망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여기서 더 찌면 윤석열이고, 빼면 소지섭이라고". 그랬더니, 옆에 앉은 올케가 웃으면서, "에이~ 그 정도는 아니예요!"합니다. 


이어서 누나인 제가 윤석열 검찰 총장 장모의 부동산 비리 얘기를 꺼내려고 했더니, 남동생과 올케는 똑같이, "장모가 한 일을 사위가 어떻게 아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조국 전 장관과 그의 아내에 대해선 비난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동생은 자기는 윤석열 총장이 좋다고 합니다. 저희 가족들 안에서만 해도 이렇게 서로가 뜻이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뜻이 달라도 친정엄마가 정성스레 차려주신 갈비찜과 제피장과 봄나물 반찬은 맛있기만 합니다.


눈치를 채셨겠지만 제가 태어나서 학창시절을 보낸 곳은 부산입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보았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서대신동 로터리에 그 만큼 많은 인파를 처음 보고 놀랐던 일입니다. 김영삼 후보의 연설을 들으려 몰려든 수많은 인파에 마음이 들뜨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노태우 후보의 "우리가 남이가!" 유행어에 진한 결속력을 느끼던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살던 집이 대학교 근처에 있다 보니 최루탄 냄새가 나기도 했습니다.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또 대학생들 데모하는갑다." 하시던 얘기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부산의 우리 부모님 세대들은 무조건 그 당시의 여당을 지지했습니다. 저도 그런 모습을 자연스레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을 국어국문학과를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학과방에선 한겨레 신문만 받아 보았고, 선배들이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는 모습을 보면서 신입생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동제를 하던 가을에는 모르고 선배들을 따라서 거리 행진을 나갔다가 얼떨결에 놀라서 함께 뛰기도 했습니다. 1학년 성적은 학사 경고를 안받을 정도만 하면 된다는 선배님들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루의 수업을 마치면 1학년이었던 우리 동기들은 열심히 학회 선배들을 조용히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다음 학년부터 학부제가 시행되면서, 97학번들부터는 1학년 때 성적순으로, 2학년부터 국문과와 한문과로 나뉘게 되면서, 차츰 그런 공의로운 모습들은 학교에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학년 학과방과 졸업 때까지 시를 쓰던 동아리방에서 선배들의 기타 반주에 맞춰 따라 불렀던 민중노래들이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개표를 하던 밤이었습니다. 친정집 거실에서 저녁밥을 먹은 후, 밥상에 이어서 조촐한 술상을 놓고 온식구가 둘러 앉아 있었습니다. 지금의 남편과 저는 노무현 후보를 찍었고, 엄마와 남동생은 무조건 아버지를 따라서 한나라당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텔레비젼이 정면으로 보이는 자리에 앉으시고, 저는 마주앉다 보니 등 뒤로 힐끔 힐끔 개표 진행 상황을 지켜보면서, 서로가 원하는 결과를 기다리는 초조한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저도 모르게 그만, '만세'를 외치며 함박웃음을 터뜨린 것입니다. 그때는 제 나이가 어려서 일순간 남동생과 아버지의 표정을 먼저 살피지 못한 것입니다. 잠시 싸늘해졌습니다. 남동생이 먼저 조용히 말문을 열었습니다. "누나 니는 눈치도 없나." 그제서야 아버지의 표정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하시진 않으셨지만, 제 눈을 못 마주치시며 고개를 떨구시고는 침통해 하시는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후로 2013년 18대 대통령 선거 운동 때 길거리에서 받으신, 박근혜 후보의 전단지 얼굴 사진을 아버지는 거실벽에 붙이셨습니다. 평소에 니스칠을 주기적으로 하시며, 못질도 아껴서 꼭 필요한 자리에만 하시던 말끔한 거실의 나무벽에 테이프로,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면 눈높이 정도에 붙여진 박근혜의 웃는 얼굴. 친정집에 내려갈 때마다 저는 박근혜의 웃는 얼굴을  봐야만 했습니다. 2014년 세월호가 터지고 촛불 집회를 할 때에도 박근혜의 얼굴은 늘 그 자리에서 웃고 있었습니다. 해가 잘 들지 않던 거실이라 그런지 몇 해가 지나도록 전단지 사진은 색도 바래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박근혜가 탄핵이 되었을 때에도, 아버지가 교통 사고로 돌아가신 후에도,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사진을 떼지 않았습니다. 동*개발의 무자비한 재개발로 마지막으로 몇 안남았던 우리집이 철거가 되던 날이 되어서야, 박근혜의 사진은 불과 20여 년 전에 지어진 나무벽과 하나가 되어 함께 뜯겨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21대 총선을 치르면서 친정엄마에게 제 나름 최선을 다해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드렸습니다. 코로나19 대응으로 외국에선 한국의 문재인 정부를 두고 지구를 지켜주어서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고. 친정엄마는 "그래 그래" 잘 들으시고는 결국 딴소리를 하십니다. "난 그래도 하늘나라에 있는 너거 아부지 따라한다."가 굽히지 않으시는 친정엄마의 뜻입니다. 젊은 남동생도 생전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이 자녀의 도리이자 의리라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누나가 정의를 말하면, 남동생과 친정엄마는 의리를 얘기합니다. 남동생이 탤런트 김보성 못지 않은 의리파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대학 시절에 학생 회장으로 추천된 남동생은 극구 사양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대의원이라도 해야한다면서 선후배 동기들이 밀어준 일이 있었습니다. 경합을 붙었던 상대 후보는 이미 그 전 해에 대의원 경력도 있는 유능하고 유력한 선배였다고 합니다. 투표 결과는 남동생의 승리였습니다. 그날 함께 투표 운동을 했던 한 팀의 학우들이 축하주를 마시러 가자며 모두가 승리의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생은 아무리 생각을 해도 유능한 선배가 떨어지고 자기가 당선이 된 것이 아닌데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낙선한 그 선배의 마음에 얼마나 상심이 클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동지들을 다 돌려보낸 후, 대의원에 당선이 된 남동생은 그 낙담한 선배 곁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말없이 그렇게 둘이서 밤을 지새었다고 합니다.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평소에도 마음이 어질고 그렇게 따뜻하고 의리가 있습니다. 어쩔 때는 정의만을 외치는  누나가 부끄러울 만큼 남동생의 마음은 어진 것입니다. 대의원 시절 연말 정산에선 가장 큰 2절지에 학생회비 사용 내역을 두고 10원 단위까지 꼼꼼이 적어서 학우들 앞에서 발표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날의 사건으로 학우들로부터 더욱 신뢰와 존경까지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졸업을 한 달 남겨 놓고 서울에 면접을 보러 가게 된 남동생이 집에 와서 감동 받은 얘기를 해온 적이 있습니다. 면접 보러 가던 날 학우들이 대학교 정문 위에 가로로 대형 플랭카드를 붙여 주었다며... <장하다! 신동ㅇ! ㅇㅇㅇ대학의 자랑!>


그런 자랑스러운 남동생이 21대 총선 전에 울산 누나 곁에 사는 친정엄마께 꼭 미통당을 찍어야 한다며 당부한 후 내려간 것입니다. 누나에겐 총선에 대해선 한 마디 말도 안하고, 웃으며 막걸리도 마시고 옹심이 칼국수가 맛있다며 재밌게 어울려 놀던 남동생과 올케는 결국 열렬한 미통당인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도 이렇게 서로가 뜻이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서로의 투표 자유권에 대해선 거론하지 않을 만큼 성숙한 가정이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이미 갈등과 다툼의 터널을 지나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끝나지 않은 평행선과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할 지도 모릅니다. 가족들과의 반가운 만남이 코로나19 위기 상황 안에서, 서로가 접촉을 조심하면서, 그럼에도 남동생과 올케와 조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저 반갑고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만 한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친정 아버지 살아 생전에 넌지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왜 그리 싫어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맨날 허~ 웃기만 하고 바보아이가!" 저는 속으로 우리 아부지가 사람 하나는 참 잘 보시네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혼자서 속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런 바보가 참 좋다고, 바보 김수환 추기경님처럼, 바보 이태석 신부님처럼, 우리나라에는 정치인 중에서도 바보가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살맛 나고 행복하다고. 참으로 사람 냄새 나는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라서, 대통령이면서 국민 앞에서 지혜로운 바보가 될 수 있다고.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이 있던 날, 남편은 저녁 퇴근길에 검은 비닐 봉투를 들고 들어왔습니다. 막걸리 한 병과 캔 사이다 하나가 나옵니다. 평소에는 술을 입에도 안 대던 사람입니다. 텔레비젼이 켜진 방문 밖 벽에 기대어 두 개를 섞어 마시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시어머니 돌아가실 때 한 번 울고, 출가하려고 떠났던 저 때문에 두 번 울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소식에 눈물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저녁 반주로 막걸리와 와인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울산에 올라오는 날이면 남동생은 매형이 좋아하는 막걸리를 잊지 않고 사갖고 옵니다. 그리고 함께 마십니다. 남편은 넌지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해 봉하마을에 내려가서 노무현 대통령님이 따라주시는 막걸리를 꼭 한 번 마시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인터넷에서 사진을 뒤진 적이 있습니다. 논둑길 앞에 앉아서 찾아온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시는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이 평소 제가 그리워하며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울산, 부산, 대구, 경상, 강원 지역의 분홍색을 보고서 저 역시 순간 실망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염려가 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예상대로 파란색이 훨씬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한 것입니다. 저는 비록 민주 정의파 파란색이지만, 옛어른들의 의리를 이용해 거짓 선동한 분홍색 당원들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분홍색 안에서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은 가족과 이웃으로 끌어 안으려 합니다. 


어쩌면 자칫 파란색이 오만으로 탈선하려고 할 때마다, 견인과 견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분홍색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 사회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나라 안에는 여당과 야당이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더불어 정의와 의리가 나란히 함께 걸어가는 평화로운 가정과 평화로운 나라를 그려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누구나 주인이 되는 자유와 평화의 이 땅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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