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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무말랭이가 먹고 싶다는 딸아이

by 한종호 2019. 12. 31.

신동숙의 글밭(46)

 

무말랭이가 먹고 싶다는 딸아이


학교를 가야 하는데 딸아이가 일어날 줄을 모릅니다. 목도 따갑고, 코도 막힌다며 이불을 끌어 안습니다. 학교를 가든 병원을 가든 한 숟가락이라도 떠야 움직일 수 있다고 했더니, 담백하게 끓인 김치찌게를 밀어내고는 삶은 계란만 겨우 집어 먹습니다.
 
아이들이 열이 나거나 아프다고 하면 동네에 있는 소아과를 갑니다. 진료를 받는 이유는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더 자세하게 알기 위해서입니다. 독감이면 A형인지 B형인지 검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진료 확인서를 제출해야 병결이 인정이 됩니다. 병원에서 처방하는 해열제, 소염제, 소화제, 항생제를 먹지 않고 신종플루와 독감을 지나온 게 어느덧 7년이 넘어갑니다. 그리고 타미플루는 먹은 적이 없답니다.

양약 대신 비타민과 물을 먹습니다. 그리고, 열이 날 때는 학교에서도 등교를 거부하기에 자연스레 집에서 뒹굴거리며 쉬게 합니다. 아마도 이럴 때가 직장에서 일을 하는 엄마들은 가장 마음이 무거운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에게 양약을 먹이고 싶지 않아도 달리 선택의 방법이 없기에 그저 답답한 마음이리라 여겨집니다. 마땅히 자녀를 맡길 곳도 없다면 그 난감한 마음은 누가 만져 줄 수 있을런지요.

약국에서 파는 비타민 외에, 저희 집에선 천연 비타민으로 히비스커스와 로즈힙을 줍니다. 그리고 제철 음식 중에 비타민이 풍부한 음식은 우리가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그런 것들입니다. 겨
울철엔 유난히 비타민이 풍부한 음식이 많습니다. 귤과 대추와 시래기와 무우가 있고요. 특히 무우는 말릴수록 비타민 함량이 높아진다고 하니 그 자연의 조화로움과 세심함에 감탄과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집에서 쉬게 하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비교적 자유롭게 먹이고, 4~5시간 간격으로 비타민과 물만 줍니다. 열이 40도가 다 되어가는 고열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가 하는 일은 열을 확인하면서 편하게 지켜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콧물, 기침 등은 한의원에서 처방하는 국민의료보험 적용이 되는 가루 감기약을 따뜻한 물에 타서 줍니다. 그렇게 아이가 집에서 모처럼 뒹굴거리는 시간은 선물 같은 하루일 테고요.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마음껏 노는 날. 엄마로썬 핸드폰만 없다면 금상첨화고요. 

그렇게 2~3일이 지나면 깨끗하게 낫습니다. 가까운 곳에 이 보험 적용이 되는 가루 한약을 처방하는 한의원이 있다면, 신뢰할 만한 고마운 곳일 겁니다. 대부분은 한의사가 직접 지어주는 한약을 처방하는데, 이 보험 적용이 되는 가루 감기 한약을 처방하는 곳이 잘 없는 이유는, 수지 타산에 맞지 않으면서, 양·한방을 통틀어서 감기에 가장 효과가 좋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보이는 아이러니한 양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약은 너무 잘 들어도 안되고, 전자제품은 너무 튼튼하게 만들어도 안되는 그런 이유일 테지요. 참, 비타민과 물 처방은 의사와 약사가 가르쳐준 의사·약사의 가족용 처방입니다.

딸아이는 코가 막혀서 입맛이 없다고 합니다. 죽을 사줄지 끓여 줄지 잠시 고민하다가 먹고 싶은 게 있느냐고 물으니, 마침 딸아이 눈에 반찬 가게가 들어왔나봅니다. "무말랭이가 먹고 싶어." 무말랭이 3천원 어치를 사갖고 나오면서, 법정스님의 무말랭이 이야기가 문득 맑고 푸른 하늘처럼 떠오릅니다. 

 '오두막 윗목에 종이를 깔고 잘게 썬 무를 말리고 있다. 낮에는 햇볕이 들어오는 곳이다. 겨울 동안 내가 즐겨 먹는 부식인데, 그 어떤 찬거리보다도 이 무말랭이를 나는 즐겨 먹는다.
  
  얼마 전에 장에서 무를 한 배낭 가득 사왔다. 그때 그 무게가 아직도 내 왼쪽 어깻죽지에 남아 있다. 개울물에 씻어서 물기를 말린 뒤 난롯가에 앉아서 삭둑삭둑 썰 때 울리는 도마질 소리가 잔칫집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산중에서 벌어지는 겨울 잔치.

  말린 무를 바구니에 담아 두고 필요할 때 꺼내어 한 단지씩 채워 진간장을 부어 놓는다. 가끔 작은 주걱으로 뒤적여 간장이 고루 베어들도록 해야 한다. 간장이 충분히 배어들지 않으면 질
기다. 꺼내 먹을 때 고춧가루와 참기름과 깨소금 그리고 입맛에 따라 설탕을 조금만 치거나 치지 않아도 된다.

  무말랭이는 조근조근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난다. 나처럼 성질이 급한 사람도 무말랭이 먹을 때만은 천천히 씹어 그 특유한 맛을 음미한다. 송나라 때의 왕신민이란 학자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람이 항상 나물 뿌리를 씹어 먹을 수 있다면 백 가지 일을 이룰 수 있다.' ( 법정 스님의 '무말랭이를 말리면서', <홀로 사는 즐거움> 中, 샘터, 2004년, 161쪽 >

그러고 보니 딸아이가 딸기가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얄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바람에 입씨름만 몇 마디 하다가 밤이 깊었습니다. 이 글을 적는 내내 마음에 걸려서 날이 밝으면 딸기 사러 가야 겠습니다.

오늘은 2019년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읽던 책들을 잠시 덮어두고,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을 넘기면서 조촐하고 그윽한 시간을 보내고픈 그런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고요하게 앉아서 침묵의 기도 속에 잠기는 따뜻하고 충만한 시간을 갖고픈 그런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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