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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고독과 침묵을 사랑한 사람들

by 한종호 2019. 12. 23.

신동숙의 글밭(38)

 

고독과 침묵을 사랑한 사람들

 

올 한 해 뜻깊은 일 중에 하나가 평소 존경하는 분들의 저서를 모으는 일이었다. 모아서 처음부터 다시 읽는 일이다. 곁에 두 고서 거듭 마음에 새기고 싶은 그런 애틋한 마음이었다. 이미 절판이 된 책들은 온·오프라인 중고서점에서 구했고, 보수동 책방 골목도 여러 차례 찾았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윤동주, 법정스님, 신영복 선생님, 권정생 선생님 등 나에겐 별이 된 이름들이다. 그중 가장 많이 모은 저자가 법정스님이다. 지난여름에는 1976년에 발행된 <무소유>부터 연대순으로 읽어가기로 했다. 다독가였고, 애서가였던 스님의 책 속에는 조주선사부터 한시, 당시, 선시 등 눈을 밝혀 주고 귀를 맑게 하는 이름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중에 의외다 싶으면서 수긍이 가는 이름들도 있었으니, 스님의 책에서 자주 등장하는 영성가들이다.

 

성 프란치스코, 본회퍼, 토머스 머튼, 사막 교부들. 그 중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은 스님이 애장 하며 읽던 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자유를 사랑한 스님에겐 종교의 벽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종교와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이미 내면 여행에선 좋은 스승과 벗이 된 영혼의 길벗들.

 

(고)김수환 추기경의 초대로 명동 성당 100주년 기념 미사를 법정스님께 부탁한 아름다운 일화가 있다. 당시에 스님은 축도 중에 '천주님'이라는 이름을 부름으로 또 한번 그 자리에 참석한 천주교인들의 마음에 따뜻한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이맘때 동짓달이면 성북동의 길상사 담벼락에는 <아기예수님 탄생을 축하합니다>라는 축하의 글이 적힌 현수막이 햇살을 쬐며 겨울바람에 펄럭이고 있을 것이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아름다운 맑고 향기로운 모습들이다.

 

법정스님과 스님이 좋아한 영성가들의 하나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다. 고독은 단순한 사회적 고립을 넘어서는 의미를 지닌다. 세상과 깊이 소통하기를 원할수록 영성가들은 더욱 깊이 홀로 침잠함으로 고독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내게 있어서도 고독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중 중요한 한 가지는 내면으로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한 그루 나무가 땅속으로 뿌리를 내리는 모습과 닮아 있다. 사색과 묵상으로 뿌리를 내리며 침잠하는 고요한 시간. 고독에 기대어 침묵의 기도를 드리는 평온한 시간. 그 고요함 가운데 문득 가슴으로부터 물결처럼 일렁이는 의미와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다. 신앙인에겐 나아가 비로소 하나님과 만나는 자리.

 

요즘을 꽃피우는 시절이라고도 한다. 지나온 역사와 시대에 억눌렸던 예술혼들이 맘껏 피어나는 시절. 그 꽃을 보면서 나는 뿌리를 본다. 잎과 꽃을 피우기 이전에 선행되는 일이 뿌리를 내리는 일이기에. 사람의 의식이 성장하는 모습이 자연의 이치와 닮아 있다면, 뿌리 내림은 필연성이 된다. 터널 같은 어둠으로, 섬이 된 것 같은 고립감으로 문득 문득 찾아오는 고독의 방에서 보내는 초대장. 그 초대가 때론 못 견디게 쓸쓸함으로 다가오던 시절이 있었다. 그 좁은 순례길에 만난 앞서 간 영성가들의 체험담과 묵상집은 내겐 마치 헤매던 어둠 속에서 별자리를 발견한 듯한 기쁨과 위안으로 다가온다.

 

오늘도 가족들이 잠든 조용한 시간에 전깃불을 끄고서 책상 위에 작은 스탠드 조명과 촛불을 밝히며, 따뜻한 차 한 잔을 준비한다. 책 속에서 만나는 토마스 머튼, 그에게 고독은 '행복한 고독'이었다. 물론 그도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이다.(<토머스 머튼의 단상>, 토머스 머튼 지음, 김해경 옮김, 바오로딸)


그의 수많은 저서 중에서도 묵상이 가장 무르익은 시기의 묵상집이다. 조금은 두꺼운 분량 앞에서 숨을 천천히 깊이 고른다. 설렘으로 떨림으로 토마스 머튼을 만나러 길.

 

이렇듯 고독과 침묵을 사랑했던 이들은 홀로 침잠하여,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 그 자신은 물론 같은 길을 걷는 영성가들과 세상과도 더욱 깊은 소통과 영혼의 교제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본다. 땅속으로 뿌리를 깊이 내릴수록 줄기는 하늘로 쭉쭉 자라며 뻗어나갈 수밖에 없는 자연의 이치 앞에 겸허해진다. 나에게도 일상 가운데 행복한 고독의 방으로부터 초대장이 날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다. 내겐 무엇보다 하나님과 예수와 만나기를 원하는 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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