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동지 팥죽 속에 뜬 별 하나

by 한종호 2019. 12. 22.

신동숙의 글밭(37)

 

동지 팥죽 속에 뜬 별 하나

얼마 남지 않은 2019년을 떠나보내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 한 해의 마지막엔 언제나 지나온 마음을 돌아보게 하는 분위기가 스며있는 것 같다. 동지 팥죽 하면 문득 2000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가 새 천년이 시작된 직후였으니까. 당시에는 새로운 세기에 대한 희망보다는, 시대도 한 개인으로서도 걱정과 막연함으로 어수선하고 어둡던 시절이었다. 시절이 그랬고, 내 마음이 그랬다. 요즘 취업준비생들의 마음이 어떨지 더불어 헤아려 보게 된다. 

학교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이라는 전공을 살리기엔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취업 공부를 다시 시작할 때였으니까. 인문학이란, 질문을 씨앗처럼 심는 학문임을 이제야 돌이켜 헤아리게 된다. 결실을 보기엔 시간이 충분히 흐르지 못했을 뿐, 지금 돌아보면, 분명한 것은 질문과 고민의 깊이 만큼 그릇이 깊어지고 커진다는 사실이다. 한 번 뿌려진 씨앗은 눈에 보이지 않더래도 어떻게든 뿌리를 내리는 법. 윈도우와 천리안 통신이 이제 막 웹 인터넷으로 넘어가던 첫 시기에 배운 홈페이지 만들기. 

홈페이지는 어디까지나 나의 관심과 세상의 관심이 겹쳐져 서로 유익과 즐거움을 주는 주제로 정하기로 했다. 한동안 주제 선정을 두고 밤새 얼마나 고민을 했던지, 그것은 나 자신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물음들이 되었다. 내가 어디에 관심이 있고 좋아하는지 알아간다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길과 다르지 않음을 본다. 그때 깊어진 고민의 깊이가 어느 분야에서든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본다. 깊이 뿌리를 내릴 수록 줄기와 가지는 위로 자라는 법이기에, 창조성의 뿌리내림이 되는 질문과 묵상과 사색의 중요성을 거듭 새겨본다. 오늘날 아이들의 학교에서도 인문학과 좋은 책읽기의 중요성을 학생들에게 되새겨 주시는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들의 모습에 반갑고 고마운 마음
다.

취업, 세상으로 내딛는 첫 발걸음이기에 열심보다는 선택이 조심스러웠다. 당시에 읽었던 책에서 새겨진 말씀. '사람이 30대 이전에 경험한 바가 평생의 밑그림이 되는 경우가 많다.' 당시
에는 기도 제목도 구체적으로 정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기도하면 기도한 그대로 이루어질까봐. 나중에 이루어진 다음에 이게 아닌데 한다면 그만큼 난간한 일이 없을 거라는 예감. 학교 공부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살이에는 많다는 걸. 세상짐 혼자 다 진 것처럼, 태산처럼 나를 누르던 생각들, 20대 초반.

바른 삶, 무엇이 바른 삶인지, 걸어가야 할 길인지 스스로도 헤매던 무렵이었다. 그랬기에 내가 드릴 수 있는 바램과 소망이란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바르고 착하게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어떤 게 바르고 착한 삶인지 알게 해주세요. 그 길로 인도해 주세요. 나와 세상에 유익이 되고 행복이 되는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그리고 태어난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그 주어진 사명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책을 읽다 보면 언제나 한결같은 얘기를 한다.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나 스스로가 행복해야 한다고. 그리고 참된 행복 그 밑그림에는 언제나 자연과 진리와 자기자신이 깔려 있음을 얘기한다.

 

그 당시에 어렵사리 꼭 마음에 들어 선정한 홈페이지 주제가 <24절기와 세시풍속>. 그대로 홈페이지의 제목이 되었다. 24절기와 세시풍속은 우리 민족의 생활 기반이 농사를 짓던 시대에서 나온 문화였다. 그 농사란 2차~4차 산업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무의식 중에도 엄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저변 의식이 됨을 보았다. 먹고 사는 문제와 생명이 직결된 일이기에 누군들 피해갈 수 있으랴. 단지 아는 만큼 보일 뿐이다. 쌀 한 톨에서 농부의 땀방울을 볼 줄 안다면, 비와 햇살을 내려주시는 분을 마음으로 그려볼 수 있다면 고마운 것이다.

대부분의 절기와 풍속이 자연과 농사철과 음식이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그런 절기와 풍속에는 선조들의 정신과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자연을 벗 삼아서 농사를 지으며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가던 옛 선조들의 순하고 참되고 천진난만한 그 마음을 알아가는 여정. 그것은 점점 자연과 내면으로 향하는 순례길과 다르지 않음을, 마음과 영혼에 가까워지는 길임을 보았다.

당시에 도서관과 서점을 돌며 동짓날과 관련된 정보를 손 닿는 대로 거의 다 수집했었다. 책과 인터넷에서도 찾아보았으나 정보는 지식사전에 나와 있는 몇 가지 상식처럼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이 글을 적느라 다시 찾아보아도 여전한 모습을 본다. 우리의 풍속들 대부분이 농사와 관련해서 음력을 따르는 반면 24절기는 양력을 따른다. 

오늘은 12월 22일 동짓날이다. 일 년 중 해가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 하지와 대비되는 절기로써 이 긴 밤이 지나면서 점점 해가 길어지는 정점의 날. 밝은 낮이 점점 길어지리라는 희망에 부푼 날. 무엇보다 동지 팥죽을 먹는 날. 시집을 오고 처음 맞이하던 동짓날. 시아버님께서 팥을 한 봉지 주고 나가시면서 동지 팥죽을 끓일 줄 아느냐고 물으시길래, 해보겠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24절기 중 동짓날을 공부한 바가 있지 않았던가. 첫발을 떼던 취업 전선처럼 이론만으로 실전에 들어간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팥은 아무리 삶아도 말랑해지지 않았으며, 설탕은 아무리 넣어도 시중에 파는 단맛에는 미치지도 못함을 보았다. 소금간의 의미를 알게 되고, 우여곡적 끝에 끓여낸 동짓 팥죽 한 그릇이 모
양새를 갖추었다. 시아버님이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던 기억이 있다. 그 후 도와주는 손길 없이 두 아이를 키우면서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점점 멀리하게 되었으니, 이제 이 얘기도 추억담이 되었다. 오늘은 어디서 동지 팥죽 한 그릇을 사먹어야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손수 끓여서 집안 가득 구수하고 푸근한 팥향을 풍기기를. 선조들의 풍류가 깃든 마음 넉넉한 날이 오기를 바라는 소망별 하나 띄운다.

동짓날과 같은 무렵에 든 소중한 날이 있다. 아기 예수의 성탄일인 크리스마스다. 20년 전 홈페이지를 만들던 당시에도 크리스마스를 어디에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을 했었다. 달력엔 빨간날, 공휴일로 지정이 된 크리스마스. 아기 예수의 성탄일이 따로 있음에도 동짓달 밤이 가장 긴 겨울날을 예수의 성탄일로 지정한 의미를 되짚어 본다. 

일 년 중 가장 춥고 밤이 긴 겨울밤의 크리스마스 이브와 크리스마스. 세상이 가장 어둡고 춥고, 마음이 가난하던 그 시대에 가난한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별을 보며 아기 예수를 찾아가던 동방박사의 얘기가 아름답고 따뜻하다. 동짓날 동짓 팥죽을 먹으면서 내 마음 가장 어둡고 춥고 깊은 곳에 뜬 별 하나를 본다. 그 이름은 예수다. 어둔 밤 내면에 뿌리내림과 같은 지난한 세월을 견디게 하는 별 하나. 그 별 하나를 가슴에 품고서 걸어가는 순례길이다. 새알처럼 떠오르는 이름마다 축복의 기도를 드린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빈다. 예수의 이름으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