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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by 한종호 2019. 12. 15.

신동숙의 글밭(32)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거꾸로 말하면,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건 좋은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라 칭하지 않고 가슴이라고 한 것은 실제로 심장을 중심으로 가슴에서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슴이 넉넉하거나 이타적인 사람은 못된다. 내 마음에 들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밥 한 숟가락 입에 넣지 않는 꽉 막힌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내겐 어려서부터 다른 무엇보다 늘 마음이 문제였다.

 

놀이터에서 땅거미가 질 때까지 흙투성이 땅강아지가 되도록 장에 가신 엄마를 기다리며 온종일 배를 골아도 나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엄마 얘기로는 젖배를 골아서 그렇다는데. 태어날 때부터 몸에 배부른 기억이 없다면 상대적인 배고픔에도 무딘 것인지. 애초에 결핍을 먼저 경험했다면 그 결핍이 오히려 몸에 익숙함이 될 수 있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내겐 배고픔보다 더 커다란 허기, 결핍이 먼저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헤아려보면 환경적인 가난은 내겐 근본적인 문제가 안되었다. 언제나 마음이 문제였다. 놀이터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으면 뒷산 바위산에 올라가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대여섯 살 무렵이던 그때 가슴으로 들어온 커다란 하늘이 내 마음의 밑그림이다.

 

 

 

20대에 어느날 책을 읽다가 내 마음을 사로잡은 구절을 만났다. 논어의 한 구절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하면 마음대로 행해도 법에 걸림이 없다. 그런 사람이 말을 하면 시가 되고...' 세상에 그런 경지가 있다니! 마음대로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해도 남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오히려 마음대로 행 하는 것이 세상에 덕이 된다니!

 

내겐 숨 쉬는 동안 끈질기도록 문제가 되는 것이 마음인데, 윤동주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살아있음 자체가 괴로움인 나에게 그런 마음 공부라면 안 할 수 없지. 그때부터 내 가슴에 한 알의 씨앗처럼 심겨진, 삶을 움직이는 길이 된 것은 마음에 자유함을 주는 마음 공부였다.

 

당시에 서점가에 붐이 일던 인디언, 티벳, 인도의 명상 서적, 스님들의 저서, 라즈니쉬와 마하리쉬 등 요가 수행자, 자연주의자, 철학서, 정신분석과 심리학 서적, 심심풀이 심리테스트, 시, 동화책, 고전, 국악, 클래식, 발라드, 가곡, 그림, 그리고 무엇보다 자연. 마음을 맑게 밝힐 수 있다는 좋은 건 뭐든지 마음 닿는 데까지 읽으려고 했다. 그럴수록 마음을 탁하게 하는 것은 저절로 멀리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음을 보고 있었다.

 

어깨가 빠지도록 도서관에서 집으로 책을 날랐으니까. 집에서 내다 버린 책도 적지 않다. 읽었던 책들 중에서 마음에 남아 내세울 만한 건 몇 권 안되지만, 그저 지나온 걸음이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나중에 자녀와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에서 '무릇 지킬 만한 것 중에 네 마음을 지키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잠언 4장 4절)'  그 말씀에 비추어 적어도 그동안의 걸음이 틀리지는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비로소 마음이 쉼을 얻게 되었다.

 

신약에서 예수의 말은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그전에 접했던 마음으로 인도해 주던 모든 글들이 진리의 그림자이거나 어딘가 모자란 한 조각이었다면 예수의 마음은 온전했다. 이 땅에 사람으로 난 자 중에서 어디에도 걸림 없이 내 가슴으로 바로 들어온 마음은 예수 뿐이다.

 

내 마음 깊이 흡족해서 내 영혼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만난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는 사람들 중 스치는 옷깃에서  예수의 향기를 맡을 때면 마음이 좋아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가슴에 한 점 별빛으로 때론 햇살처럼 들어온 예수를 모실 곳은 가슴으로 품는 방법 말고는 나는 달리 알지를 못한다.

 

건물도 내 가슴에 품을 수가 없다. 다이아몬드도 가슴에 품을 수가 없다. 학력과 재력과 명예와 인기도 잠시 필요에 따라서 악세사리는 될 수는 있겠지만, 가슴에 품기에는 불순물이 많아서 내 마음엔 저절로 꺼려지는 것이다.

 

가슴에 품을 수 있는 것만이 내 영혼이 좋아하는 것임을 본다. 그리고 자연. 환한 햇살은 아무런 걸림 없이 가슴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사랑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언제나 가슴으로 먼저 들어온다. 그리고 우리말의 아름다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장 1절)'. 하나님이 공평하게 내려주신 말과 글은 특정인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의 밑그림이 된 커다란 하늘에 길이 되어 주는 건 말과 글이다. 진리의 몸이 된 예수와 자연의 아름다움이 좋은 길이 된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공명이 되는 이들은 내겐 길벗이 될 테지만, 그렇지 않은 많은 이들 중에는 내 가까운 가족부터 벗과 지인까지 그 수가 더 많다. 그래서 외로운 길이었지만, <논어>에서 '덕 있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같은 뜻을 지닌 이가 있다.'( 송대선 목사님의 시편사색 中)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픈 것을 이제는 기력이 소진되는 느 낌으로 가늠한다. 그래서 간단하게라도 챙겨 먹는다. 마음의 일도 그와 마찬가지여서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채움과 비움이 끝없음을 예감한다. 견뎌야 하는 그 지난한 순례길에서 내겐 좋은 벗이 시詩를 쓰는 일이다. 시를 쓰는 것만큼 명료해진 마음으로 말씀의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음악과 그림 등 다른 방법도 있다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말과 글로 오신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다른 방편으로 예술 활동을 하는 이가 마음의 글을 매일 한 줄이라도 적는다면 보다 스스로가 마음에 흡족함을 느낄 수 있고, 하고 있는 일이 더 온전해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글과 동행하지 못하는 그림과 음악이 때론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을 본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내가 소망하는 인생은 모든 사람이 시인의 가슴을 지니는 것이다. 학자, 과학자, 육체 노동자, 감정 노동자, 학생, 주부, 농부, 성직자, 유아들까지 누굴 막론하고 마음이 있는 사람에겐 그 가슴에 맴도는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 오랜 동안 가슴에 맴도는 이야기를 글로 옮겨 적으면 시가 된다는 말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도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는 그 그윽한 자리에 언제 초대를 받을지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두루 살피시며 적당한 마음밭에 소망의 씨앗을 떨구시는 분도 거두시는 분도 진리의 성령일 테니 넉넉한 마음으로 맡길 뿐이다.

 

좋은 건 가슴에 품는다. 오늘 아침의 햇살도 가슴에 품는다. 좋은 말씀 한 구절도 가슴에 씨앗처럼 품는다. 품는다는 것은 가슴이 따뜻해지고 환해지는 경험이다. 그리고 가슴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고요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일상이 기도가 되고, 시와 노래가 되어 맑고 환하게 흐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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