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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서점 점원이 되는 꿈

by 한종호 2019. 12. 9.

신동숙의 글밭(27)

 

서점 점원이 되는 꿈

 

소망이 하나 생겼다. 서점 점원이 되는 꿈. 머리가 복잡한 주인이나 서점의 건물주가 아닌 그냥 점원이다. 새책이 들어오면 제자리에 꽂아 놓고, 서점 안을 두루 정리도 하고, 손님이 원하는 책이 있으면 찾아 드리고, 선뜻 책을 고르지 못하는 손님이 계시면, 미안해 하지 않도록 말없이 곁에서 기다려 주는 그런 마음 따뜻한 점원. 물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설명해 드릴 수 있는 친절한 점원. 그리고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그 사람만을 위한 책을 추천해 줄 수도 있는 능력 있는 점원.

 

이쯤 되면 서점 점원은 거의 약을 처방하는 의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몸이 아닌 마음에 대한 처방이 될 수도 있기에. 한 권의 책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는 말은 종종 매스컴에서 들어온 말 이다. 물론 신문의 책 광고란이 제일 많이 인용하는 문구이긴하지만. 나는 언제든 그 귀여운 말에 속아 넘어가 줄 수 있는 그 정도의 넉넉한 마음은 있으니까.

 

 

 

방금 다른 손님에게 했던 설명을 또 해야 될 경우에도 매번 처음인 듯 새롭게 얘기할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있기 때문이다. 그건 나를 만나 본 주위 사람들의 평가 중 하나니까. 오히려 듣는 쪽이 지겨워할 수는 있겠지만. 일 년 동안 그 이상 반복하래도 지겨워하지 않을 자신이 내겐 있다는 게 핵심이다. 거짓말처럼 들린다면,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 보면 영 엉뚱한 얘기도 아닌 것이다. 아침마다 어김없이 하나님이 띄워 주시는 태양이 지겨웠던 적이 있던가. 단지 그 앞에 내가 작아졌을 뿐이다. 거듭 나를 내려놓을 뿐이다.

 

나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매 순간이 새로울 수 있을 것이기에. 똑같은 말이라 해도 그건 흐르는 냇물에서 같은 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이치와 같기에.


밥을 먹고, 세수를 하는 일이 반복되지만 똑같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다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 로 주시는 하루처럼 그 마음 한결같을까, 그러면서도 또 매 순간이 이토록 새롭게 다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여전히 누군가에겐 반복되는 일상이 곤욕일 수도 있다. 나 역시 그런 날이 왜 없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반복을 조금은 견딜 수 있는 내 나름의 힘이 있다. 돌아보면 내겐 시를 쓰는 일이 그 힘의 원천이다. 샘물처럼 속에서 우러나는 힘. 그리고 가슴에 품은 예수가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주기에 가능한 일이다.

 

설명했던 말을 또 해야하는 일. 그것도 매번 새로웁게 기쁜 마음으로 전달하는 일. 그래서 상대가 행복을 느끼도록 하는 일. 그건 알고 보면 건물주가 되는 일보다 더 대단한 재능인지도 모른다. 매 순간 깨어 있으려는 의식엔 호흡처럼 쉼이란 없기에.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가 더불어 즐거울 수 있는 일이니까.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책 정리와 책 소개에 대한 대목이다. 그정도 능력을 갖추려면 서점 안을 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 여기서 사장님과 점원인 내가 서로소통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아야 하는 지점이다. 서점 안에 있는 책은 무엇이든 읽어도 좋다는, 그리고 나도 점원으로써의 예의는 최대한 지킬 것이다. 심지어는 의리까지도. 서점에 있는 책을 읽게 될 때면, 종이를 접거나 활짝 펼치지 않는다는 예의와 만일 책에 손상을 끼쳤을 경우에는 기꺼이 구매하리라는 의리.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실현을 위한 노력을 한시도 쉬지 않았다는 헤르만 헤세.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자신의 개성에 눈을 뜨면서 시인을 꿈꾸기 시작한다. 신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해 탈출한 그가 제일 먼저 선택한 직업이 서점 점원이었다고 한다.


내가 고등학생 시절 방 안에 앉아서 읽었던 헤세의 <데미안>. 그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데미안이라는 이름과 의식의 심연은 어떠한 깊이로 내게도 각인이 되어 있다. 그 뒤로 다시 펼치진 않았으니, 소설보다는 수필이 먼저 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아마도 내 관심사를 눈치 채셨으리라. 책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태초에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말과 글. 이 말과 글이란 어디까지나 사람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 될 때 진정한 생명력을 얻으리라. 고로 내 관심사는 서점을 찾는 사람들을 향해 있다.

 

요즘도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들판이 펼쳐진 시골 마을을 볼 수 있다. 외곽에는 공장이나 식당이 즐비해 있긴 해도, 시골 마을이란 으레 농사를 지으며 터를 일구며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곳. 그런 마을 어귀에는 언제나 마을을 지키는 당산 나무가 서 있다. 지금도 시골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당산 나무는 그 덩치에 먼저 감탄하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디었을 그 꿋꿋함에 숙연한 마음까지 드는 것이다. 여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잠시 땀을 식히는 그늘이 되어 주고.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는 곳.

 

언젠가부터 온라인 서점과 대형 서점들에 밀려 문을 닫고 있는 작은 서점들. 중학생 시절 내가 처음으로 내 손으로 골라서 샀던 법정스님의 <인도기행>과 도올 김용옥의 <중·고생을 위한 철학강의>. 이 두 책과 인연이 된 곳도 동네 작은 서점이었다. 가끔 마을의 당산 나무와 같은 동네 서점들이 하나 둘 사라지는 모습에 잠시 안타까운 마음긴 했으나. 그럼에도 어디선가 꿋꿋이 자리를 지켜가고 있는 작은 서점이 우리 곁엔 더러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지난 가을 어느 날 언양 시장을 지나다 작고 허름한 서점을 발견한 적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선뜻 들어갔다. 인사를 하고는 서점을 한 바퀴 돌면서 눈에 들어오는 대로 대여섯 권의 책을 골랐다. 헌 책방에서나 만날 법한 이미 오래 전에 출판된 노천명, 천상병 시인들의 시집들. 얼마나 오랜 시간 책장에 꽂혀 있었던지 먼지가 하얗다. 하지만 내게는 보물을 발견한 기쁨이고, 소장하고픈 책들이다.

 

마을의 당산 나무 그늘처럼 사람들이 모여드는 동네 서점이 그립다. 마음 맞는 이들이 언제든 찾아들 수 있는 당산 나무 같은 동네의 작은 서점. 시골에선 당산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들판과 먼 산과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일상에 지친 마음들을 나누었으리라. 마을의 동네 서점에선 나무를 깎은 종이에 마음의 결을 손질한 꿈과 희망과 사랑이 담긴 책을 보면서 일상에 지친 서로의 마음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

 

그런 동네 서점에선 좋은 책이 천장까지 쌓여 있을 테고, 가끔은 좋은 벗들이 모여서 얘기를 나눈다면 얼마나 좋을까. 따뜻한 차 한 잔 나누면서 마음을 나눈다면 이 겨울이 얼마나 따뜻해질까. 토담집 화롯가에 둘러앉은 듯 때론 좋아하는 작가로부터 이야기 한 자락 듣는 날의 겨울밤은 짧기만 할 텐데. 커피나 차와 간단한 빵과 과일을 늘어 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예수를 나누는 그런 동네 서점이 그립다.

 

나중에 혹시 내가 서점 점원이 되는 꿈에 그리던 날이 온다면. 주인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요구한다면, 이 글이 자기소개서가 되리라. 20년 전, 대학 졸업 후 뭐한다고 서울로 취업을 하러 그렇게들 꾸역꾸역 올라갔던가. 나도 그 중에 한 명이었으니. 그때 내 고향에서 서점 점원이란 직업을 생각치 못한 건 어디까지나 그 당시에 내 지성이 부족했음의 소치다.

 

유럽에는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열리는 독서모임과 작가와의 만남이 소소한 일상의 모습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동화책의 유명 작가가 동네의 작은 서점에서 어린 독자들과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는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사실은 동네 작은 서점이란 의식이 깨어 있어 앞서 가는 나라들에선 꾸준히 지켜가고 있는 만남과 사랑의 샘터가 된다.

 

요즘은 우리나라도 집 주변에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갈수록 중요해진다. 한 마을에 있어서 도서관의 역할이 있다면, 작은 서점의 역할이 따로 있는 것 같다. 도서관이 정숙해야 하고, 대중적인 행사에 치중한다면, 서점은 어찌 보면 책을 좋아하는 이라면 언제든 빵이라도 사들고 가서 주인과 직접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될 것이다. 때론 도서관에선 할 수 없는 두런두런 얘기도 나눌 수 있는 사랑방과 같은 작지만 보다 더 따뜻한 공간일 테니까. 누구보다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마을의 작은 서점은 곁에 두고픈 그런 곳이다. 마을의 당산 나무처럼 그늘이 되는 사랑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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