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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줍기의 고결함

by 한종호 2019. 11. 21.

신동숙의 글밭(1)

 

 줍기의 고결함

 

가로수 은행잎이 쪽빛 가을 하늘 가득 노랗게 피었습니다. 무딘 가슴까지 환한 노란빛으로 따뜻해져 옵니다. 어제 내린 가을비가 재촉하는 바람에 도로에는 일찍 떨군 은행잎이 노랗게 피어 폭신한 융단길을 내어줍니다. 너무나 많아서 일까요. 한 잎 주워서 더 가까이 손으로 만져보려는 마음일랑 접어둔채 그저 가던 걸음을 재촉할 뿐입니다.

 

인도로 내려앉은 은행잎은 발길에 소리 없이 밟히지만, 어쩌다 차도로 내려앉은 은행잎은 어김없이 짓이겨져 바람에 무겁게 날리울 뿐입니다. 어디로 어떻게 떨어져 생에 마지막 빛깔을 피울지는 바람에게 물어보면 대답을 들을 수 있을런지요. 노란빛으로 환했던 마음이 땅을 보며 걷는 동안에는 안쓰러움으로 그늘이 집니다. 땅으로 깔리는 그림자처럼. 하지만, 그림자에도 환한 빛을 비춘다면 그림자는 사라질 테지요.

 

단감과 사과, 귤, 대봉감, 양배추, 쪽파 묶음 다발이 인도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마트가 멀찌감치 눈에 들어옵니다. 그보다 조금 먼저 눈에 들어온 모습이 있습니다. 노랗던 가슴이 철렁 땅으로 내려앉게 한 모습. 고개를 숙이고서 구부정한 몸으로 폐지를 수레에 차곡히 쟁여두고 계시는 할머니입니다. 지나다가 가끔 눈이 마주칠 때면 "안녕하세요" 귓전에 부는 바람결인 듯 조용히 인사를 건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할머니의 눈길이 땅을 향해 있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폐지 조각이라도 한달음에 쫓아가 하나라도 더 줍기 위해 낮아진 눈길. 차가 달리는 찻길 한가운데만 아니라면 도로의 구석 구석을 살피는 눈길. 그 할머니의 눈길은 제 유년 시절, 그 눈길에 닿아있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모여 뛰놀던 모래 놀이터. 땅 따먹기, 두꺼비집 짓기를 할 때면 머릿니 찾듯이 모래 속을 헤집어 찾습니다. 나뭇가지, 돌멩이, 유리조각, 비닐 조각을 발견했을 때의 마음은 보물찾기와 다르지 않았답니다. 땅에서 주운 생의 부스러기들은 알뜰살뜰한 정겨운 소꿉 살림이 되어주었으니까요.

 

그때는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던 시절이기도 했답니다. 쓰다가 버린 찌그러진 빈 깡통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을지라도 요긴한 물그릇이 되어, 두꺼비집을 지을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에서 주운 부스러기들이 더럽다는 생각이 하나도 안들던 어린 시절.

 

이제는 곱게 물든 은행잎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이 마음은 그만큼 뭔가에 가로막힌 탓이겠지요. 구겨진 폐지 조각을 찾아 줍기 위해 온통 눈길이 땅으로 가 있는 할머니의 마음을 제 마음에 포개어 대고서 그림을 그려봅니다. 놀이터 모래밭에서 소꿉 살림 살이를 찾던 어릴 적 그 마음과 폐지 조각을 찾으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간절함의 빛으로 닮아 있지 않을까 하는 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값어치를 따지기에 앞서 아무리 작고 하찮은 나뭇가지, 빗물에 젖은 폐지 조각이라 할지라도 구하는 것을 찾는 마음에는 동일한 간절함의 빛이 비추일 테지요. 옛 속담에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흔하던 것도 막상 구하고 찾는 순간이 되면 귀해지고 그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어쩌다 구하지 못할 때면 간절한 마음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빈 수레를 채워줄 폐지를 주우시는 할머니의 마음에 그런 간절함이 있다면 폐지의 값어치와 행위의 귀천을 따지기에 앞서 그 행위 자체로 고결한 모습인 것입니다. 땅에서 줍는 것이라면 입에서 뱉어낸 침 말고는 더럽고 쓸모없는 것이 없던 어린 시절.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땅에서 나는 모든 것들이 귀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잊혀진 순결함에까지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가을 추수가 끝난 후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 농부의 마음에 더러움이란 있을 수 없듯이. 손끝에 잡히는 이삭 한 톨의 소중함을 알기에 등을 누르는 그 생의 무게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줍기의 고결한 손길로 이어집니다.

 

도로 위 일상에 치이고 밀려 발걸음을 재촉하느라 무디어진 우리의 마음이 보지 못하는 삶의 보석 같은 순간들이 이 땅에는 얼마나 많은지요. 무수함 앞에 헤아리기를 포기한 은행잎 만큼 많을런지요. 가을 바람에 땅을 구르며 춤 추는 은행잎에 슬쩍 눈길만 줄 뿐 선뜻 몸을 구부려 한 잎 줍지 않는, 그 땅과의 단절감.

 

폐지를 줍는 할머니에게서 강물처럼 이어져 흐르고 있는 줍기의 고결함을 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이삭을 줍던 고결한 손길과 겹쳐서 바라봅니다. 땅에 깔리운 생의 그림자도 따뜻한 눈길로 빛을 비추어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림자는 사라질 테지요. 대신 그 자리에는 환하고 따뜻한 마음이 노란 은행잎처럼 피어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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