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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빠삐용 순이

by 한종호 2019. 10. 16.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89)

 

빠삐용 순이

 

영월 김 목사님네 개 이름은 순이이다. 순하게 생긴 진도개인데, 실은 순하지 만은 않다. 얼마 전까지 작은 시골마을에서 목회할 때 순이는 놀라운 재능을 발휘하곤 했다. 아침과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 목줄을 풀러주면 맘껏 사냥을 즐겼던 것이다.


고양이도 아닌 것이 쥐를 손쉽게 잡는 것은 물론 야생 고라니도 여러 마리를 잡았다. 걸음 재기가 여간이 아닌 고라니를 잡을 정도니 그 끈기와 집념은 알아줄 만한 것이었다. 아마 범을 만났어도 물러서지 않고 맞짱을 뜨지 않았을까 싶은 순이였다. 이름만 순해 보이는 순이였을 뿐 순이 안에는 누를 수 없는 야생의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동네 이웃집 닭까지 물어 죽여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물어준 돈이 이미 제 몸값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 결정적인 흠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순이에게 최근 새로운 별명 하나가 붙여졌다. 이제 순이는 빠삐용 순이로 불린다. 순이가 빠삐용이란 이름을 얻게된 내력은 다음과 같다.

 

 

 

 

 

순이는 몇 달 전에 이사를 했다. 목회지를 영월 읍내로 옮긴 김 목사님을 따라 거처를 옮긴 것이다.시골에서 강가를 마음껏 뛰던 순이가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개집은 가히 다른 개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집이었다. 전임자가 개를 두 마리 키웠고, 넓은 울타리 안에는 개 집이 두 개 마련되어 있었다. 널찍한 울타리 안에 집이 두 채, 세상 어느 개가 그런 호강을 누리겠는가? 날이 더운 날엔 그늘진 집에서 지내고, 추운 날엔 볕 잘 드는 곳에서 지내니 여름 별장과 겨울 별장을 따로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순이를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순이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숨이 멎도록 마음껏 뛰는 것이었다. 바람처럼 강가를 달리며 고라니를 잡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데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니 순이로서는 견딜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땅을 파기도 하고 울타리를 뛰어오르기도 하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던 순이가 마지막으로 택한 것이 탈출이었다. 울타리에는 유일한 구멍이 있었다. 밥과 물을 넣어주는 공간이었다.


어느 날 순이는 그 구멍을 통해 울타리에서 빠져나왔다. 철망 사이로 낸 구멍은 결코 큰 것이 아니어서 도저히 순이가 빠져나올 만한 공간이 못 되었다. 그곳을 빠져나왔다니, 순이로서는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 것이었다.


읍내를 뛰어다니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일, 어렵게 순이를 잡아 울타리에 넣은 목사님은 순이가 빠져나온 구멍에 철사를 둘렀다. 하지만 순이의 탈출은 계속됐다. 철사를 이빨로 끊기도 했고, 굵어진 철사를 한쪽으로 밀어내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구멍을 막는 철사는 점점  굵어졌고 구멍은 촘촘해졌다. 이제는 순이도 안다, 더는 그 구멍을 통해서는 빠져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빠삐용이란 이름을 얻게 된 내력을 듣고 김목사님 내외분과 순이에게로 갔을 때, 순이는 반갑다고 난리를 치지 않았다. 주인이 다가왔는데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순이에게서 체념한 자의 슬픔 같은 것이 진하게 느껴졌다. 순이는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천천히 개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또한 드러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슬픔을 다른 행동으로 감추려는 것처럼 보였다.

 

넓은 울타리에 집이 두 개, 다른 개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조건이지만 순이는 즐겁지 않다. 조금 넓고 안락한 감옥에 갇혀 있을 뿐인 것이다.


빠삐용이란 이름을 얻은 순이는 어느 날 거짓처럼 사라지는 것 아닐까. 영화 속 빠삐용처럼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로 빠져나갔지를 알 수 없는, 순이 만의 탈출구는 그래도 무엇인가 남아 있지 않을까.

 

순이를 보며 자유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것없이는 살 수 없는. 속박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렇게는 살 수 없는.


없던 날개라도 돋아 마침내 빠삐용처럼 자유를 누렸으면, 순이가 그랬으면, 그런 생각이 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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