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백한 삶을 향하여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7)

담백한 삶을 향하여

입춘이 지난 후 찬 바람이 좀 불기도 했지만 왠지 봄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은 나날입니다. 요즘은 무지근한 어깨 통증 때문에 잠을 설치곤 합니다. 통증은 마치 자명종처럼 일정한 시간에 제 몸을 깨워줍니다. 참 신기하지요? 어깨를 좀 주무르다가 문득 ‘인생 참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잠시 어둠이 익숙해진 후에는 스며들듯 서재로 들어갑니다. 책들이 어지럽게 쌓여 있는 것이 마치 제 내면의 풍경 같아서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가만가만히 성경을 소리 내어 읽고, 침묵 기도도 드리고 난 후에는 책의 감옥 속으로 들어갑니다. 오랜 습관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책을 뒤적이기도 하고, 밀린 글을 쓰기도 하는 것이지요.

엊그제는 중국 철학자인 리쩌허우의 《미의 역정》을 읽었습니다. 중국의 상고 시대부터 명·청대까지의 미의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고 유익했습니다. 저자의 해박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에 질투심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야기가 위魏·진晉 시대에 이르렀을 때 리쩌허우는 <세설신어世說新語>가 펼쳐 보이는 인간의 내재적 지혜와 품격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 시대가 제시한 이상적인 인물의 풍모를 이렇게 말합니다.

“해와 달을 가슴에 품고 있듯이 환하다, 바위 아래로 내리치는 번개처럼 두 눈동자가 반짝인다, 봄날의 버드나무처럼 해맑다, 굳센 소나무 아래로 부는 바람처럼 꿋꿋하고 힘이 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그윽하고 심원하다, 천길 석벽처럼 고요히 우뚝 서 있다.”

물론 이것은 <세설신어> 이곳저곳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리쩌허우가 모아놓은 것입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과장기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가슴 한 켠이 시원해졌습니다. 이런 이들과 함께라면 이 시대를 통과하는 동안 우리 마음에 울혈처럼 맺힌 답답함이 말끔히 해소될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반성도 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잗다랗게 변해버린 내 모습이 상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위에서 언급된 인물평이 전부 자연물과 연관되어 있군요. 사람이 자꾸 작아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발터 벤야민은 사용가치보다 과시가치가 중시되는 상품 자본주의 세상을 일러 ‘판타스마고리아’라고 하더군요. 자기 삶을 참답게 살아낼 내적 능력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판타스마고리아에 집착합니다. 휘황하기 이를 데 없는 그 환상의 세계는 우리를 영원한 빚쟁이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 세계에서 만족은 언제나 일시적으로만 향유될 뿐 지속적인 기쁨은 허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욕망과 충족과 권태 사이의 시간은 점점 짧아지면서 호흡은 가빠지고 삶의 활력은 급격히 고갈됩니다. 삶은 언제나 다른 곳에 있습니다.

 

 

며칠 전 목회실 식구들과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데 청명한 하늘이 참 시원해 보였습니다. 사무실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이켜 가까운 공원을 향해 천천히 걸었습니다. 날이 포근한 탓인지 제법 많은 이들이 공원에 나와 한가롭게 거닐고 있었습니다. 산책로를 따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습니다. 느릿느릿 걷는 동안 제 마음은 어느새 어린시절로 달려갔습니다. 온갖 생명이 한데 어울려 장엄 세상을 이룬 그 시절이 그리웠습니다. 골고루 가난했으니 이웃들끼리 오고가는 정도 깊었더랬습니다. 아, 우리는 그 세계로부터 얼마나 멀리 떠나 온 것일까요? 개구리와 뱀에 얽힌 기억들을 나누다가 문득 양서류와 파충류의 차이가 궁금해졌습니다. 동행한 이들 가운데서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들 생물 수업 시간에 분명히 배웠을 텐데 이미 레테의 강물을 절반쯤 마신 탓인지 빙긋 웃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한 분이 인터넷 검색을 하더니 파충류와 달리 양서류는 올챙이 시절을 거치는 동물이라고 말해주더군요.

자연과 더불어 오이쿠메네를 이루어 살면서도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지 모릅니다.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우리 주변에서 무수히 피었다 지는 들꽃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영혼이 지금처럼 빈곤해진 것은 볼 마음만 볼 수 있는 일상의 기적에 짐짓 눈을 감고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고 노래했지요? 이 눈 하나가 열리지 않아 우리 삶이 이 지경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이 ‘초월자의 암호’라고 말했습니다. 그 암호를 읽어내고 그것을 해독해 낼 능력이 갖춰진다면 우리는 영적 빈곤에 시달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농담처럼 신학교를 졸업하는 이들에게 몇 가지 시험을 치르게 하자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 산과 들녘에서 자라는 들꽃과 우리 땅에 깃들어 사는 새들, 우리 강과 하천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의 이름과 생태를 익히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별자리 이름까지 익힐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자연 세계에까지 의식의 지평이 확장되면, 생태적 감수성이 깊어지면,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 속에 그 이름들이 들어오면 우리가 애집하던 것들의 매력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고백하면서도 세상에 널려 있는 하나님의 작품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세계를 누릴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인위적인 것들에 집착합니다. 저는 자본주의 세계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세상의 미세한 것들 속에 깃들어 있는 하늘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목사들이 특급 호텔을 드나들고, 값비싼 자동차에 집착하고, 백화점을 제집 드나들듯 합니다. 온 세상의 죄와 슬픔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팔아 제 배를 불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번영의 복음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기들이 하늘을 가리켜야 하는 이정표라는 사실을 잊고 삽니다. 입술로는 하늘을 말하면서도 인위적이고 자극적인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들로 인해 종교는 노쇠해지고 있습니다.

노자는 다섯 가지 색이 우리 눈을 멀게 하고, 다섯 가지 소리가 우리 귀를 멀게 하고, 다섯 가지 맛이 우리 입맛을 상하게 하고, 말 달리며 사냥질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힘든 재화가 사람을 어지럽힌다고 말했습니다(노자, 12장). 저는 이것을 담백함이야말로 도에 가깝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자극적인 것보다 고졸古拙한 것이 우리 마음에 평화를 가져옵니다. 감정을 끌어 올리는 복음성가들보다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떼제 찬양에 제가 이끌리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언제쯤이면 우리 삶이 일렁이는 버릇에서 벗어나 담담해질 수 있을까요? 불의한 세상은 아직 우리에게 안온한 평화를 허락할 생각이 없나봅니다. 험악한 세상이지만 부디 청안청락하시길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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