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

  • 목사님,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김윤수 권사님의 수원 사는 딸 박 경희 권사입니다. 목사님이 펴내신 책들을 통해 세상살이 하는대 지고가기 버거운 짐들을 내려놓는 은혜와 감사, 그리고 사랑을 보게 하시니.. 이 난을 통해 감사드립니다.

    박경희 2015.02.03 12:25

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6)

사람은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

 

잘 계시지요? 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얄팍한 독기마저 잠시 내려놓기로 했다는 말씀이 참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수상한 세월을 건너다보니, 일상에서 느끼는 사소한 행복조차도 죄스럽게 여겨집니다. 한편에서는 행복에 대한 은근한 욕망을 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욕망을 품었다는 사실 자체를 자책하는 동안 자기 불화의 골은 깊어만 갑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고 하지요? 날마다 접하는 어두운 소식들 때문인지 영혼에 드리운 구름의 무게가 천 근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마음이 무거울 때면 정진규 선생의 시구가 떠오릅니다.

“지금 나 한 사날 잘 열리고 있어

누구나 오셔, 아름답게 놀다 가셔!”

-<몸詩·14> 일부

시인은 왈큰왈큰 알몸을 열어 보이는 진달래꽃을 바라보다가 그만 봄 신명에 지폈던 것 같습니다. 신명에 지피면 자기라는 감옥에서 벗어나오게 마련이지요. 신명은 언제나 타자에 대한 경계심을 완화시켜주니까요. 우리도 언젠가는 저 시인의 말처럼 잘 열릴 수 있을까요? 그래서 네 편 내 편 가리지 않고 누구나 초대할 수 있는 날이 오기는 올까요?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데,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어떤 무지근한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올랐습니다. 굳이 감동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실 어떤 곡이었는지 기억도 안 납니다. 시원의 아득함을 상기시키는 맑고 투명한 음색이 제 심금을 울렸던 것 같습니다. 울고 싶던 차에 뺨을 맞은 격이랄까요. 혼잣소리처럼 “아, 저렇게 노래를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말하자 곁님은 덤덤한 목소리로 “그냥 즐기세요”라고 말하더군요. 제가 이렇게 멋없는 사람과 삽니다.

어떤 분야에서든 탁월한 성취를 이룬 사람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것이 예술 분야든 운동 분야든 기술 분야든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아레테(arete)’는 그리스 사람들이 참 소중히 여겼던 가치입니다. 흔히 ‘덕’이라고 번역되지만 그것은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단어이기에 ‘덕’보다는 ‘훌륭함의 상태’라고 번역하는 데 나을 것 같습니다. 아레테가 사물에 적용될 경우에는 그 사물이 수행하게 되어 있는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자동차의 아레테는 안전하게 잘 달리는 것이고, 토지의 아레테는 비옥한 것이겠지요.

그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사람 구실을 할 줄 아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사람 구실이 뭐냐는 질문은 일의적으로 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다양한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일 테니까요. 그래도 그리스 사람들은 사람의 아레테가 실현되는 몇 가지 방식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지나치게 부족하거나 과도하지 않아야 하고(適度), 조화로워야 하고(均衡), 경우에 맞아야 하고(適合性), 진실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행동을 이 척도에 자꾸 비춰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델피 신전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적혀 있었다고 하지요? 결국 사람의 아레테는 자기를 아는 데서 얻어지는 가치라는 뜻이겠지요.

 

 

아레테의 반대말은 ‘카키아(kakia)’입니다. ‘나쁜 상태’를 이르는 말이지요. 자동차의 카키아는 자꾸 고장이 나는 상태일 것이고, 토지의 카키아는 척박한 상태입니다. 인간의 카키아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마땅한 방식으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일 겁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실패한 삶, 즉 죄의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삶을 이르는 말이 되겠네요. 죄 혹은 타락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는 독자적으로(original) 태어난 인간이 다른 이들을 모사(copy)하며 사는 것을 일러 타락이라 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오늘의 세계는 우리를 끊임없이 타락의 길로 밀어 넣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르네 지라르는 우리의 욕망이 주체적이지 못함을 정치한 언어로 밝혀낸 바 있습니다. 그는 욕망의 주체와 대상 사이에 한 가지를 더 상정했습니다. 욕망의 매개가 그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소유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꼭 필요해서라기보다는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업 광고만 생각해 보아도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일처럼 허망한 노릇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타자의 욕망에 사로잡힐수록 주체는 점점 부자유한 상황에 빠져들게 됩니다.

오스트리아 작가이면서도 나치에 협력했던 조국을 너무나 미워했던 소설가 토마스 베른하르트 기억나시지요? 그의 책 《몰락하는 자》를 읽었습니다. 작가는 실존 인물인 천재 피아노 연주자 글렌 굴드를 등장시키고 있지만 허구와 현실을 기묘하게 뒤섞어 놓았습니다. 화자인 ‘나’와 ‘베르트하이머’, 그리고 ‘글렌 굴드’는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테움의 동기생들입니다. 그런데 글렌 굴드와의 만남은 ‘나’와 베르트하이머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꿔놓고 말았습니다. 둘은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몇 소절을 듣는 순간 평생을 노력해도 글렌 굴드를 능가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최고의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지만 글렌 굴드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태산처럼 느껴졌던 것이지요. ‘나’는 아끼던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음악적 재능이라곤 전혀 없었던 어느 교사의 딸에게 주어버리고, 베르트하이머도 음악으로부터 멀어져 아포리즘이나 쓰며 지냅니다. 글렌 굴드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베르트하이머는 서서히 몰락해갑니다. ‘나’는 다행히 몰락의 길에서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나’의 고백입니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 굴드이길 원했고 호로비츠이길 원했고, 구스타프 말러나 알반 베르크이길 원했어, 절망하지 않으려면 스스로를 유일무이한 존재로 여기고 또 그래야만 하는데 베르트하이머는 그럴 줄 몰랐던 거야, 난 생각했다.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난 끊임없이 혼잣말로 중얼거렸고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남았다. 베르트하이머한테는 그런 정신적 지주가 없었다. 즉 자신을 유일무이한 존재로 바라볼 생각조차 못 했던 건 그런 조건을 조금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모든 사람은 유일무이하며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인간은 유례가 없는 최고의 예술 작품이야, 라고 난 생각했다. 베르트하이머에게는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항상 글렌 굴드이기를 원했거나 구스타프 말러나 모차르트 혹은 다른 친구들이기를 원했던 거야, 난 생각했다”(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p.91ff).

‘사람은 그 누가 됐든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인식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다른 이의 재능이나 삶의 조건을 부러워하기보다는 자기의 한계를 받아들이되 자기답게 사는 것이 곧 용기이고 지혜일 겁니다. 마치 블랙홀처럼 우리에게서 여백을 빨아들이는 현실에 저항하기 위해서라도 아름다움 앞에 자꾸만 서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에베소서 2:10)라는 말씀을 꼭 붙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곧 입춘이 다가옵니다. 겨울 같은 세상지만 늘 봄소식처럼 다가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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