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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자리> 출간 책 서평

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by 한종호 2018. 1. 16.



 

아낌과 허비의 사이, 영혼이 따라올 시간

- 김기석 목사님 신간 《인생은 살만한가》를 읽고 -


서평을 부탁 받고 책을 읽기 전 제일 먼저 떠오른 건 저자의 글쓰기였다. 김 목사님을 생각할 때면 늘 떠올라 내게 반성과 분발로 겸손히 허리를 굽히게 하는 그분의 일상적 성실성(誠實性). 그것은 사실상 글쓰기에 앞선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 일관된 절제의 태도다. 차라리 10년이 지나도 못 쫓아오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우스개가 들어맞지 그분을 가외(可畏)케 할 후생(後生)이 있을까.


가끔 만나 뵈면 이렇게 함께 쉬어 가는가 모종의 안심이 될듯 싶은데, 보이지도 않는 말(馬)과 능히 경주라도 하는 듯 또 저만치 앞서 달음질을 놓으신다. 날짜와 시간과 날씨와 컨디션을 망라한 일체의 핑계가 소용에 닿지 않는 이 가혹한(!) 성실성. 이것이 그분의 진정한 설교의 출처로서 그 모든 부분 일관되게 게으른 후생들로 거기에 대면하면 일체의 변명을 깨끗이 포기하고 기꺼이 항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공부 못하는 학생이 방학을 만난 듯 오히려 그 앞에 후련해지는 항복이다. 나로 말하면 여전히 게으른 채로 항복했으면서도 탐내며 존경하고 있는. 첫 장을 펼치니 그런 내 첩경에 미리 가 있는 것처럼 이런 말씀을 하신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은 모래 속에 묻힌 사금을 찾는 것과 유사하다. 글을 쓴다는 것은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경험을 체로 거르고 또 거르는 일이고, 글쓰기의 보람은 인식의 지평에 떠오른 낯선 광휘와 마주치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그 빛과 마주치는 순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깨단하게 된다”(5쪽).


‘깨단하다’(어떻게 이런 말들을 깨알같이 알고 계시는지)는 찾아보니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분명히 알다’라고 돼있다. 모래 속에 묻힌 사금, 특별할 것 없는 일상, 거르고 거르는 체질, 거기서 떠오른 금빛 광휘와의 낯선 만남, 그러니 그의 글쓰기(삶의 전체적 성실성)란 계속하여 이 사람들의 생활이라는 것 속에서 오래 생각나지 않는 중인 어떤 것을 생각하는 중인 것이고, 그것이 걸러져 마음에 남은 금알갱이의 반짝임처럼 떠올라 그것이 금(金)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되는 보람을 위한 끝없는 체질인 것. 떠오른다 했지만 실은 연금(鍊金)이고 제련(製鍊)인 끝없는 노동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쯤은 알고 있다. 그 성실성이나 인식의 지평 위에 떠오른 금싸라기의 보람이란 여전한 체질의 과정인 일상의 부분이지 그것의 한가로운 열매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가소로운 말이지만)정말 나로선 여기서 문맥(文脈)을 놓치면 영 놓치게 되어 따라가기는커녕 딴 길로 가리라는 것 정도는 간파했다고 믿고 싶다. 스스로 속지 말아야 한다. (사람들이 얼마나 잘 속는지!) 이 문맥은 그렇게 쓰여진 글의 맥락이 아니라 그렇게 말하는 이의 절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속이는 사람도 없는 데 속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역시 깨단함이 없기 때문이고, 거르고 걸러 오래 생각나지 않다가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고 분명히 알게 되는 살아감에 관한 실사구시(實事求是)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일껏 보여주었는데도 못 보고 기껏 보고서도 도루묵인.


“텔레비전을 통해 정치인들을 보면 괜히 우울해져요. 그들은 절망과 환멸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들을 정치인이 아닌 맨 얼굴의 이웃으로 만나도 마찬가지 느낌일까요? 그들은 가족들 앞에서도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갈까요?”


“글쎄다. 하지만 노파심에서 하는 말인데 우리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전칭명제로 말하는 것은 옳지 않아.”


“아빠도 그렇게 말씀하실 때가 있잖아요?”


“그랬나? 하지만 그것은 일반화의 오류인 동시에 정신적 폭력이야. 감정적으로는 나도 어떤 집단의 사람들을 한통속으로 몰아붙이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고, 또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나의 미성숙의 증거일 뿐이야.”


“하지만 사람이 이것저것 다 가리면서 어떻게 살아요? 가끔 실수도 하고, 오버도 하면서 사는 거지요.”


“물론 그래. 하지만 타인이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돼. 그의 가면 속에는 분명 말랑말랑한 맨얼굴이 있지 않겠니? 게다가 시간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실의 실체를 온전히 보고 있다고 주장할 수 없거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모든 근본주의의 뿌리야. 타자에 대한 폭력은 흔히 자기 생각의 절대화에서 비롯되는 걸 거야.”(「가면과 맨 얼굴」, 24쪽)


지혜자들의 말씀들은 찌르는 채찍들 같고 회중의 스승들의 말씀들은 잘 박힌 못 같으니 그것들은 다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 같다(전도서 12:11).


젊은 날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누군가의 말에 양심이 찔려 의기가 소침해지고 약간의 항거를 하고 싶지만 결국 기가 꺾이는 경험을 자주 한다. 그런 말들은 사람도 사람 나름이라서 아는 사람이라면 되려 가소롭거나 아니꼬워 내 기가 살고 양심이 담대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카운터 펀치를 허락하고 의문의 여지없는 일패를 더하기도 한다. 며칠씩 혹은 더 긴 날들을 절치부심으로 끙끙 앓으며 내 의기와 양심 사이에서 괴로워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나는 이제 수락을 괴로워하지도 않고 의기와 양심 사이의 갈등을 고통스러워하진 않게 됐다. 괴로웠던 것은 내가 수락할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고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타인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이기 때문이다.


소소하다면 소소한 이런 대화 속에서 나는 나의 오랜 분투의 핵심을 깨단하게 된다. 가면과 맨 얼굴이 타자들의 얼굴에 관한 게 아니라 내 얼굴에 관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까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근본주의의 뿌리이며 내 사고의 절대화에서 나는 벗어나질 못했던 것이 아니던가. 더 높고 중한 하나님의 원리에는 둔감하고 알량한 내 자존과 아집의 위상만을 걱정해온 게 나의 의기소침이고 항거가 아니었던가. 하여 나는 이런 말을 듣기만 했지 이런 말을 해 본 일이 없고, 대개 이런 말들을 불신만 했지 내 영혼에 닿는 채찍으로 수락할 줄 몰랐던 것이다.



김 목사님에게는 진리의 첨예함에 입각해 있는 진보성과 함께 얼핏 보수적으로 느껴지는 고전성이 있다. 진보적이면 일반화의 오류나 정신적 폭력에 편벽되기 쉽고(아니 편벽되고 싶고) 고전적이면 위선적이거나 고루하기 쉽다. 나는 아마 그런 모양만 보고 그런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늘 치우치는 경향을 주체 못하며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반성이나 성찰의 여지없이 그 길로 쭉 나가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대개는 선배들에게서 발견할 수 없었던 그 모든 진보성과 보수성의 고루함에서 벗어난 모종의 가능성을 발견할 때 나는 나의 결과를 알면서도 멈추고 싶지 않은 편협으로의 행진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멈추고 싶어진다. 이쯤 되면 나는 아마 이런 것이 내겐 없는 것으로 내게 주어진 선물처럼 그것을 탐내보려 하는 것 같다. 허허(虛虛)! 선물을 탐내다니.


가령 또 이런 부분.


“다만 내가 겪어왔던 어려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거지.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 그러면 그분들은 처음으로 자기들의 틀을 깨고 제3자를 의식하게 돼. 그게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말이야.”(「영성의 깊이란 무엇인가」 35쪽)


교회에서 각자 충성스럽고 소중한 두 사람이 싸우고 반목할 때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옳고 그름도 있을 테고 옳음과 그름의 우열도 있을 터이다. 이럴 때가 내게도 있다. 이럴 때 나는 대개 기계적 중립의 태도를 취했다. 그러면서 분명 옳고 그름에 대한 내 나름의 분명함을 어떡하든지 어필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니 나타내지 않으려 노력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 태도는 내겐 불가피한 처신으로 일종의 자기를 부인하는 희생적이고 의로운 태도로 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들 때문에 내가 몹시 힘들다. 두 분 다 소중한 분들이지만, 이런 점은 공동체에 부담이 된다.’라는 말을 해보지 못했을까? 혹은 나는 왜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엡 4:25)라는 말씀을 담대히 믿지 못했을까?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노라는 나의 용기는 사실 과장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일 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38쪽).


김 목사님은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이다’라는 말을 ‘진실일텐데, 우리가 진실한 걸까?’라고 하시는 분이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생의 토대는 결국 진실입니다’라고 말한다.


연전 내가 몹시 앓고 있을 때 목사님으로부터 안부를 묻고 위로하는 문자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날은 비가 내렸고 날씨만큼이나 내 심경은 복잡하고 우울했다. 목사님의 곡진한 위로의 몇 마디가 나를 흔들었던 것일까? 나는 응석처럼 구구절절의 편지를 써 보냈다. 한 번 더 내 마음을 위로해 줄 곡진한 말씀을 내심 기다렸던가. 그러나 목사님으로부터는 ‘마음과 몸 잘 추스르시라’는 간단한 답신이 왔다. 그때 나는 뭔가 내둥 안 하던 짓을 처음 해놓고 막급의 후회를 하는 사람의 심정이 되어 약간은 참담하기까지 했다. 고백건대 나는 사실 누군가에게 내 괴로움을 토로해 본적이 별로 없다. 


‘인생은 혼자 가는 먼 길’이라 아내에게도 내 괴로움에 대해 속속들이 알려 하지 말라고 권한다. 직업상 타인들의 괴로운 고민을 듣고 성실로 답변을 하기도 하지만 정작 내 대답이 답변이 되리라 믿질 않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를 속이는 것이므로. 결국 해답은 당사자 자신에게서 나와야하는 것이고 어차피 겪을 것은 온전히 자신이 겪어야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내가 왜 이미 문자를 받고 또 뭔가를 갈구하는 글을 써 보냈던 것인가 말이다. 아내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아내는 나를 위해 서운한 모양이었다. 아픈 남편에게 위로가 가득한 답신을 보내주셨으면 좋았을 걸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알았던 것이다. 김 목사님의 짧은 답신. ‘마음과 몸 잘 추스르시고 빨리 일어나시라’는 그 말씀의 의미와 그 의미의 진실과 그 진실을 지키려는 노력과 그 노력의 고뇌와 그 고뇌의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슬픔 같은 것? 그렇다! 그것은 모든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존재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이 결국은 그 자신들이 감당하고 가야하는 진실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동병(同病)의 아픈 연민이자 상련(相憐)의 깊은 슬픔. 그러니 내 맘이 부끄러운 건 내 맘의 굳세지 못함 때문이지 김 목사님의 문자 때문이 아니라고 아내를 달래주었다. 병으로 쇠약해진 나를 본래 나의 태도로 다시 일으켜 주는 안수의 말씀으로.


“결국 인간은 최악의 고통에서만이 진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이, 추운 사람이, 질병의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이 결코 점잖을 수도 없고, 성스러울 수도 없고, 거룩할 수도, 인자할 수도, 위엄이나 용기도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는 제 목에 오랏줄이 감긴 그 사람뿐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심신의 고통을 지금 맛보고 있는 그 사람뿐입니다. 가장 절실한 인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장군이나 성직자가 아닙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추위에 얼어 죽어가는 사람, 지금 병으로 괴로워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 온갖 괴로움 속에 허덕이는 사람만이 진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밤을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새우고 있을 것입니다. 밤은 평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수치와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고통의 시간이기도 한 것입니다”(이 오덕, 권정생 선생 서간집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에서 인용, 「영성의 깊이란 무엇인가」, 39쪽).


권정생 선생의 말이라는 이 말을 인용하신 뜻은 고통하는 사람에 대한 옹호와 지지일지라도 그의 자존(自尊)을 자기의 의로서 위해하게 되는 그런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아닐까. 내 일찍이 ‘문장의 핵심은 함축’이라는 말을 들었거니와 이쯤 이르면 ‘인생 전반에 대한 태도의 핵심이 함축’이 아닐까 싶다. 모든 과장과 헛된 위로의 갈구를 간파한 침묵의 응축으로서의 함축. “거기에 비하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너무나 창백해 보여.” 같은 문장을 만나면 나는 웃음이 난다. 그 정도라면 나 같았으면 ‘정치인이나 학자들의 말은 죄다 거짓말 같아, (혹은)거짓말이야.’라고 ‘쾅쾅쾅’ 못을 박지 않았을까 싶어서다. 또 이런 고백에 이르면 그 절제의 함축과 성실성이 한가로운 사색의 낭만이 아니라 가혹한 노동이라는 내 짐작이 증명된다.


“그랬나? 어쩌면 성실함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었는지도 몰라. 나는 일을 적당히, 얼렁뚱땅 하는 걸 싫어하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스스로 만든 내 이미지에 자승자박 당한 꼴이었던 것 같아. 성실한 건 좋은데 그게 고스란히 스트레스로 바뀐 게 문제지. 나는 스스로 그런 문제를 잘 풀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슬픈 몸 고마운 몸」, 47쪽).


“나는 덜 떫은 우리 젊은이들을 보면 좀 안타깝더라.”


“그래도 좀 떫게 굴면 싫어하시잖아요?”


“그건 그래.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은 상생을 위한 떫음이 아니라 자기 욕망충족을 위해 떫다가는 버림을 받기 십상이 라는 거지. 떫음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이야. 가을이 되면 단맛을 품어야지. 인생의 가을이 되었는데도 떫기만 한 사람들도 있거든.”


“작정한다고 단맛이 품어지는 것은 아니겠지요?”(「경계를 넘어」, 91쪽)


흥미로운 대목이다. 떫음에는 상생을 위한 떫음과 자기 욕망 충족을 위한 떫음이 있다는 이 분류법은 떫음의 반듯한 필요와 그 필요의 분명한 목표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것은 도덕선생의 훈계처럼 윤리적인 게 아니라 시인의 시구처럼 시적이다. 나는 궁금해진다. 가을이 되어 단맛을 품기는 사람은 누굴까? 가을이 됐음에도 떫기만 한 사람은 누구일까? 갑자기 땡감의 식감이 느껴지면서 목울대가 꽉 메인다.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지요?”(「쉼 평화의 시작」, 111쪽)


여기에 이르러 꽉 막힌 듯한 목이 스르르 풀어진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스스로가 대견해지는 법이다. 겸손이 해방이라니, 봉사가 자유라니, 책은 자기라니. 쉼이면서 평화인 곳 언저리에 나도 이른 것 같기도 한 안심에 나도 좀 쉼이 되고 평화가 되는 것이다.


“양해하겠지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알면 제가 알아서 자리를 비워줘야지요. 그건 그렇고 아까부터 왜 자꾸 한숨을 내쉬세요, 산에까지 오셔서?”


집사인 듯한 성도는 목사와 산을 오른다. 매사 불만스러운 그녀는 쉴목에 앉아 쉬어가자는 말에 그런 쉼조차 산새들을 방해하는 것이라 불평을 토한다. 도저한 평화주의자이자 의로운 심판관이지만 그 도저함과 의로움으로 다함없는 불만족과 긍휼 없는 짜증을 되돌려 받고 있는. 목사는 여유로운 위트로 성도의 조급한 마음의 숨을 돌린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렇게 말한다.


“그래요, 이제 일어나 가지요. 해 지겠어요”(「인생은 살만한가」, 134쪽).


“그런 경우를 저도 간혹 본답니다. 전 이렇게 생각해요. 진리의 길에서 멀어진 사람일수록 남의 허물을 잘 들추어낸다고요. 깨끗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지만, 더러운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더러운 법이거든요. 예수님에게는 버릴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스스로 의로운 체하는 이들은 모두 못마땅하게 여겼어요. 그런 사람들은 점점 무분별하게 되고, 헛된 말로 사람들을 미혹하고, 불의한 행실로 세상을 어지럽혀요. 그들은 가증하고 완고하고 선에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 삶이잖아요? 사람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이 정직할 때가 많아요.”(「타락한 영혼의 징표」, 184쪽)


옛날 같았으면 불만스런 성서해석이 됐을 것 같다. 아니 아직도 그런 불만이 다 해소된 건 아니다. 마치 이미 훌륭한 사회인이 된 사람이 초등학교 성적에 불만족스러워하듯이. 그것은 간혹 보이는 김 목사님의 보수적 단호함에 대한 오해가 아닐까 싶다. 금방 잊어버렸던 것이다. ‘겸손은 자존심의 무게로부터 우리를 해방해주고, 봉사는 강박관념을 씻어주고, 공부는 자기 자신을 텍스트로 삼아야 한다’던 말을. 이 모든 말들이 김 목사님 자신이라는 텍스트를 통과해 나온 자기 제련의 체질에서 얻은 일상의 성실이 걸러낸 경건의 광휘인 것을. 그러니 이런 말씀을 흔히 홍수 때 마시지 못할 물처럼 범람하는 교훈가(敎訓家)들의 도덕설교로 듣게 되는 건 곤란하다.


“나는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에게서 가장 긍정적인 것은 자기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고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세계민들 앞에 서서 그는 자기의 병세를 고했고, 사람들의 이해를 구했어. 나는 그것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고귀한 메시지라고 생각해. 그는 미국을 초강대국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결국 유한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증언한 셈이지.”(「우리는 신성함을 믿어야 한다」, 210쪽)


그리하여 이런 진리에 이른다.


“망설임은 성실성의 증거이고 확신은 사기의 증거라지요?”(「일상으로 그리는 이야기」, 272쪽)


“만물이 일어나도 막지 않고, 생겨도 잡아두지 않으며,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머물지 않는다〔萬物作焉而不辭, 生而不有, 爲而不恃, 功成而不居〕(「크리소스토모스를 그리워하며」, 283쪽).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으니 무릇 아낌을 일컬어 빨리 돌아감이라 한다. 빨리 돌아감을 일컬어 덕을 거듭 쌓는다고 한다. 나는 이군처럼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젊은이들이 이 답답한 세상에 작은 틈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몇 해 전에 텔레비전에서 수십 년을 한결같이 바위를 쪼며 우물을 파들어 가는 할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언젠가는 값진 보화를 얻으리라는 그분의 바람은 허망해 보였지만 그분의 수도자적인 몸짓에서 나는 서늘한 감동을 느꼈습니다”(「아낌 만한 것이 없다」, 315쪽).


최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허비(虛費)(혹은 탕진)’로 설명하는 설교를 했었다. 그런데 김 목사님은 그것을 ‘아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허비든 아낌이든 같은 말이지만 이 두 표현법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결이 다름을 발견하게 된다. 허비이면서 아낌인, 허비와 아낌의 사이, 자기 자신에게는 허비인 듯 하지만 세상과 타인을 향해서는 아낌으로 옮아가려는 나를 본다. 그것은 수십 년 바위를 쪼아 우물을 파들어 가는 이의 허망 같은 어리석음이나 자기 공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우주를 따르려 망설이는 수도자의 경건이리라.


본문 어딘가에서 김 목사님은 인디언들이 가던 길을 쉬며 기다리는 이유는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라고 썼다. ‘인생은 살만한가?’ 대답은 영혼이 따라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간, 기다림의 지체(遲滯)에 있으리라.


“어리석음이 없으면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고, 모든 피조물들이 자기 생명의 몫을 누리는 참 세상을 이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들의 꿈을 하늘이 외면하지는 않겠지요. 나는 이군의 답답한 마음을 일시에 해결해줄 수 있는 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답은 스스로 찾아야 합니다. 다만 그 길에서 나는 이군이 예수의 마음, 즉 ‘아낌’이라는 단어 하나를 화두처럼 붙들고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화를 빕니다”(「아낌만한 것이 없다」, 317쪽).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하는 노래가 있었지. 정말, 나도 그런 평화를 사모한다.


천정근/자유인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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