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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by 한종호 2017. 1. 30.

이정배의 고전 속에서 찾는 지혜(4)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주 늦은 시간, 서울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겨우 내려갈 때가 있다. 가로등도 드문드문한 한적한 밤길을 홀로 차를 운전하는 일은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심신이 지쳐 적적함이 극에 달할 때면 나를 멈춰 서게 하는 붉은 신호등이 반가울 때가 있다. 지나치는 이 아무도 없는 도로 한 복판 신호등의 멈춤 신호지만 어김없이 그의 지시를 따른다.


언젠가 동승했던 친구가 나의 그런 행동에 칭찬을 보낸 적이 있다. 당연한 행동을 했을 뿐인데 칭찬을 받은지라 내심 몹시 쑥스러워 했다. 실은 법과 규칙을 떠나 텅 빈 공간에 종일 서 있다가 나의 길을 간섭하려는 신호등이라는 존재와 이야기하고 싶어, 잠시 멈추어달라는 신호를 기쁜 마음으로 따른 것뿐이라는 걸 미처 설명하지 못했다.


유가의 대표 경전 중의 하나인 ≪논어≫는 공자의 어록집이다. 그를 따라다녔던 제자들이 틈틈이 기억들을 모아 편집한 책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맨 앞 책인 <학이>편은 편집자의 의도가 담뿍 담겨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람직한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하고 싶었던 편집자의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고 있다. 그 장의 맨 마지막은 다음의 문구로 장식되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논어≫,<학이> 16장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의식한다. 타인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를 칭찬하는 말에 주목하게 되고, 비난하는 말에 귀를 닫고 싶은 게 인간의 심리이다. 누군가 알아준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일을 넉넉히 해내지만, 아무도 나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음부턴 이런 일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한다.


≪대학≫ 6장에 눈에 뜨이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자겸(自謙)’이란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신독(愼獨)’이라는 단어이다. 물론 자겸(自謙)은 종종 ‘자겸(自慊)’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스스로 겸손하다’는 해석보다 ‘스스로 흡족해한다’는 풀이가 다음 문구와 잘 연결되기 때문이다. 연결되는 단어가 바로 신독이다. 혼자 있어도 스스로 삼갈 줄 안다는 뜻이다.


신독은 단순히 삼간다는 소극적인 뜻보다 뭔가를 이룩한다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소신껏 자기 행할 바를 행해나간다는 의미이다. 누가 보아주지 않아도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이 신독이다. 이를 뒤집어서 해석하면, 누가 보더라도 변함없는 태도를 보이는 일이다. 남의 눈을 의식해서 태도를 바꾸는 것은 진실하지 못하다.


≪장자≫외편 <재유>편 12장을 보면, 사람들은 너나없이 자기에게 동의해주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기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였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면 기뻐하지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반대의사를 보이면 아무리 그 말이 옳아도 싫어한다는 뜻이다. 인간의 마음 바탕에는 남들보다 뛰어나려는 욕구가 잠재해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어떤 사람을 세 번 이상 칭찬을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몰락하게 되어있다고 한다. 교만해져서 스스로 자신을 망가뜨려 몰락하거나, 타인의 질투와 견제를 받아 결국 몰락하기 때문이다. 타인의 칭찬에도 쉽게 휩쓸려 교만하지 않으며, 타인의 비난에도 마음 가볍게 흔들리지 않아야 참다운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경전의 자이다


예수께서 기도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골방’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다. 기도라는 단어를 골방이란 단어와 연결시킨 기막힌 비유법이었던 것이다. 타인을 의식한 기도인 모범적인 기도 또는 길거리기도와 대칭되는 도발적인 수사를 구사하셨기에 둘러선 모든 이들이 예수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外飾)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賞)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마태복음≫ 6장 5-7절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아예 은밀한 곳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한다. 바리새인의 신앙적 태도는 대단히 모범적이었다. 남들이 보는데서 공개적으로 유창한 기도를 했고 단 하나의 빠뜨림도 없이 율법을 실행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율법의 모든 조항들을 빠짐없이 지켰으며 그것을 신앙적 자부심으로 삼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기도가 출발부터 잘못되었음을 지적한다. 바리새인 기도의 출발점은 타인이었다.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것에 대응하는 기도를 펼쳤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골방을 기도의 출발점으로 삼으라고 한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들어앉는 것으로 기도의 시발점을 삼아야 한다고 말씀한다.


헬라어로 ‘타메이온(tameion)’이라 발음하는 ‘골방’의 어원은 조제 또는 분배라는 의미를 지닌 타미아스(tamias)이다. 따라서 타메이온은 약국, 연료실, 밀실, 저장실, 골방, 안방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큰 방에 딸린 구석진 작은 방을 가리키는 골방은 원래 제사장들이 놋제단 ,물두멍, 일곱 등대, 진설병상, 분향단 같은 제사도구를 두는 조제실이었다.


결국 타메이온은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의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 ‘기도의 공간’을 가리키는 은유가 되었다. 골방은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분리의 공간인 동시에 홀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다. 골방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경계 공간이며, 따라서 무수한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도 하나님의 역설을 목격한다. 낮아져야 높아지고 버려야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 특유의 역설적 진리를 만날 수 있다. 눈에 뜨이지 않는 은밀한 장소에서 기도하면 모든 것을 열어 밝히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보여주는 기도는 별도의 상이 없지만, 보이지 않는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상을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께서는 홀로 있어도 정직하고 올바르게 행동을 해야 한다는 유가의 가르침을 넘어 아예 때때로 은밀한 공간 속에 홀로 있으라고 말씀한다. 남들이 알아주는지 알아주지 않는지에 마음 빼앗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넘어 아예 비밀스럽게 기도를 실행하라고 말씀한다. 단단히 단속할 수 있는 밀실로 들어가 은밀하게 하나님을 조우하라고 한다.


빨리 집으로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면 점점 가속기를 세차게 밟기 마련이다. 미처 지나치는 사물을 식별할 틈이 없다.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내가 어디쯤을 지나치고 있는지 헛갈리기까지 한다. 이럴 때면 도로 중앙에 버티고 서서 껌뻑대는 붉은 눈을 만나고 싶어진다. 홀로 그와 조우해 멈춤의 가치를 은밀하게 이야기하고픈 마음이다.


이정배/좋은샘교회 부목사로 사서삼경, 노장, 불경, 동의학 서적 등을 강독하는 ‘연경학당’ 대표이며 강원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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