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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2)

by 한종호 2016. 6. 9.

구약성경의 대량학살(6)

 

하느님이 그럴 리 없다(2)

출애굽기 11:1-10

 

하느님이 정말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결정적으로 중요하고 가장 궁금한 질문을 다뤄보겠습니다. 정말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린아이들과 짐승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사울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을까요? 젖먹이들까지 말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11장이 전하는 대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야훼는 정말 이집트의 장자들을 모조리 죽였을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자기들에게 그렇게 명령하셨다고 믿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됐다고 믿었습니다. 자기들이 그 명령을 실행했다고 말입니다. 역사의 기록자들도 그렇게 믿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역사를 썼던 사람들도 마음은 불편했던 걸로 보입니다. 자기들이 한 짓에 대한 두려움과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지난 번 글에서 이런 흔적이 구약성서 곳곳에 남아 있다고 얘기했고 그 중 서너 군데를 찾아서 읽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와 같은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들이 그렇게 믿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믿어야 할까요? ‘지금’ 우리보다는 아무래도 ‘그때’ 그들이 하느님과 더 ‘가깝게’ 지냈으니 우리보다 하느님을 더 잘 알지 않겠나, 그래서 그들이 성서를 기록했던 게 아니겠나, 그러니 우리 신앙을 그들에게 맞춰야 한다고 말하는 게 옳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하느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더 많이 안다기보다는 하느님에 대한 시야가 그들보다 더 넓다고 말하는 게 진실에 가깝습니다.

 

지금부터 3천 년 전에 고대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신앙은 철저하게 ‘부족신앙’이었습니다. 곧 그들은 하느님이 나만 위해주고 우리 부족만 보호해주고 번성하게 해주고 승리하게 해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 신앙은 이 한계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그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란 생각을 그들을 가질 수 없었던 겁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그냥 ‘부족신’이었습니다.

 

그로부터 3천 년이 지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들이 넘지 못했던 테두리를 넘어섰습니다. 우리가 잘 났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시대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은 우리뿐 아니라, 당신을 하느님으로 믿는 사람뿐 아니라,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라고 믿습니다. ‘종족신’을 믿는 ‘종족신앙’을 넘어서서 ‘보편신’을 믿는 ‘보편신앙’을 갖게 된 겁니다.

 

그런데 안타깝게 아직껏 부족신앙을 유지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합니다. 자기들이 믿는 신앙이 좋은 신앙이라고 굳건히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족신앙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을 신앙 없다고 여깁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느님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햇빛과 비를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이라고 해서 망대를 넘어뜨려 죽이는 분이 아닙니다.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시각장애자가 태어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갖고 있음을 전제하고 다시 한 번 물어봅시다. 정말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을까요? 가나안 종족들을 몰살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저는 그럴 리 없다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단지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 때문에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과 단지 하느님은 그럴 리 없기 때문에 그렇게 믿을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똑같은 얘기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인 하느님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성서는 뭐냐고, 우린 성서가 말하는 하느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성서가 어떤 책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성서를 공부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엉터리로 공부하지 말고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극히 일부만 들여다봤지만 성서에는 정말 다양한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 중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얘기들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서는 하나의 통일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겁니다.

 

 

사죄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정말로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거기 맹목적으로 순종해선 안 됩니다. 맹목적 순종(blind obedience)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종교가 사악해집니다.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셨다고 믿는다 해도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으로 순종하지 말고 하느님께 질문하고 따져야 합니다. 대체 왜 그러셨냐고, 정말 그게 하느님의 뜻이었냐고 말입니다. 이 정도를 불경한 태도라고 한다면 그런 하느님은 믿을 가치가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묻고 또 물어서 끝내 대답을 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대답을 듣느냐고요? 그 방법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여러분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진정 간절히 바란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하느님께서 대답해주실 겁니다. 3천 년 전에 이스라엘이 들었던 대답이 아니라 2016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답해주실 겁니다.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렸을 리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럼 그렇지, 하느님이 그럴 리가 없지. 하느님이 대량학살 하라는 명령을 주셨을 리 없지, 없고말고.’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일까요? 그게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얘기가 떠오릅니다. 뜬금없다고 지레 생각하지 말고 좀 더 들어보십시오. 헤롯왕이 동방박사들의 얘기를 듣고 아기 예수를 죽이려다 실패하자 베들레헴 인근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이 얘기가 사실이라면 아기 예수 때문에 몇 명인지 모를 어린 사내아이들이 몰살당한 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일까요? 이 얘기가 왜 여기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실제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이 실제 일어났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기록이 남아 있을 텐데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그럼 이 얘기는 왜 여기 있는 걸까요? 마태는 왜 이 얘기를 다른 데가 아닌 여기 적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동의하는 글을 아직 만나보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얘기를 출애굽 때 이집트의 장자들이 몰살한 일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죄의 표현으로 생각합니다. 이 얘기가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 아니란 얘기는 앞에서 했지요.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은 아닐지라도 진실(truth)이 담겨 있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뭔가를 말하기 위한 전한 얘기란 뜻입니다. 물론 제 생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사렛 예수에게서 하느님을 경험했던 초대교회 신자들이 구세주 탄생이라는 기쁜 사건을 전하면서 옛날에 있었던 일, 곧 자기 조상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나왔을 때 벌어진 장자 몰살사건을 떠올리고 나름의 방식으로 사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생각은 문서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황당하다고 치부할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신약성서 학자들도 헤롯왕의 어린아이 몰살과 예수님 가족의 이집트 피난이 출애굽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 사건은 출애굽 시 벌어진 일들과 정확히 대칭됩니다. 출애굽 때는 야훼에 의해 이집트 장자들이 몰살당했지만 여기선 헤롯왕에 의해 유대인 아기들이 죽었습니다. 출애굽 때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왔지만 예수님 가족은 반대로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것이죠. 의도적인 서술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 얘기가 어떻게 ‘참회록’이 되는지는 저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 그들도 어찌해야 할 지 가늠할 수 없었을 겁니다. 뭔가 하긴 해야 하는데 그 방법을 몰랐던 게 아닐까요? 그들이 할 수 있는 게 이게 전부였을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아기 예수를 모세와 같은 반열의 지도자로 만들기 위해 이 얘기가 필요했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건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대량학살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야훼 하느님이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사죄해야 합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해도 그게 기록으로 남아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성서를 읽는 기독교인들이 오랫동안 그걸 사실로 여겨왔고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대량살상을 정당화해온 게 사실입니다. 그러니 사죄해야 한다는 겁니다.

 

1970년 12월7일 아침 7시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초겨울 비가 눈물처럼 위령탑을 적시던 날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그 앞에 섰습니다. 이 탑은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 6천여 명이 참살당한 일을 추모하는 탑입니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서자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기고 기자들도 따라서 몸을 움직였습니다.

 

이때 브란트가 위령탑 앞에 털썩 무릎을 꿇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 듯이 터졌습니다. 브란트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브란트는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겁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폴란드 수상은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그는 2차 대전 때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용서합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Forgivable but Unforgettable).” 그 후에 폴란드는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누구에 의해 누구에 대해 저질러졌든지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비슷한 일이 우리 겨레에 의해서도 저질러졌습니다. 월남전 때 파병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베트남 양민학살 얘기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군대성노예에 대해 사과하라고 요구합니다. 정당한 요구임에 분명하지만 그런 주장이 더 떳떳하려면 우리가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도 참회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이것으로 ‘구약성서의 대량학살’ 주제의 글을 마무리합니다. 결론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사죄하자’라는 얘기입니다. 거기서 새 출발합시다. 그게 과거 잘못을 씻어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학살은 우리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사죄해야 하냐고요? 거기 사죄할 필요가 없다면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해서도 사죄할 필요 없겠습니다. 우리가 학살의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일본인이 왜 사죄해야 합니까? 죄지은 당사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사죄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기록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 사죄할까요? 우리는 그걸 어떻게 후대에 기록으로 남길 겁니까? 이 글이 이렇듯 질문으로 끝나는 게 아쉽습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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