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다윗 이야기

다윗, 그는 악사인가 전사인가?

by 한종호 2015. 7. 12.

다윗 이야기(3)

 

다윗, 그는 악사인가 전사인가?

 

 

1.

 

이제 본격적으로 다윗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다윗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에서 그는 구세주 예수의 조상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이러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 7장 42절은 성경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 가운데서 날 것이요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전하며, 로마서 1장 2-3절은 이 복음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그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라고 적었고, 요한계시록 22장 16절에서는 예수가 직접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만하면 그 누구도 예수가 다윗의 후손임을 의심할 수 없다.

 

구약성서에는 특유의 탄생설화를 갖고 있는 인물들이 있다. 이삭, 에서와 야곱, 모세, 삼손, 사무엘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대부분은 불임이던 어머니에게 태어났다는 특징이 있다. 모세의 경우는 어머니가 불임은 아니었지만 태어나자마자 파라오의 명령에 의해 죽을 뻔했다. 예수의 경우는 이 모든 경우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그의 어머니가 불임이 아니라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되는 처녀였다는 차이는 있지만 태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더욱이 그는 모세처럼 태어나자 곧 죽을 뻔했다. 그의 탄생시점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이라는 헤롯의 명령은 히브리인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라던 파라오의 명령과 비슷하다. 예수는 이삭, 야곱, 사무엘과도 같고 모세와도 같은 인물임을, 이 모두를 합쳤으니 누구보다 더 뛰어난 인물임을 말하고 싶었을까?

 

그런데 다윗에게는 탄생설화가 없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이토록 중요한 인물에게 탄생설화가 없을까? 물론 그게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있을 만한 사람에게 없으니 왜 그럴까를 묻게 된다. 왜 그럴까? 왜 그에게는 탄생설화가 없을까? 그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어서는 아닐 게다. 그는 진정 중요한 인물이니 말이다.

 

룻기를 빼면 그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사무엘상 16장 13절(사무엘이 기름이 담긴 뿔병을 들고 그의 형들이 둘러선 가운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야훼의 영이 그 날부터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 사무엘은 거기에서 떠나 라마로 돌아갔다.)로서 그 이후 그가 죽었음을 전하는 열왕기상 2장 10-11절(“다윗은 죽어서 그의 조상과 함께 ‘다윗 성’에 안장되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마흔 해이다. 헤브론에서 일곱 해를 다스리고 예루살렘에서 서른세 해를 다스렸다.)까지 무려 마흔두 장에 걸쳐 전개된다. 이만하면 누가 봐도 대단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게 탄생설화가 없는 이유는 그의 집안이 워낙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말로 그는 개천에서 난 용은 아니었던 거다. 탄생설화를 갖고 있는 인물은 개천에서 난 영웅이 많으니까.

 

 

 


<"Samuel anoints David, Dura Europos". Wikimedia Commons.>

 

다윗의 등장은 사울의 몰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울이 망하면서 다윗은 흥하기 시작했다. 사울이 몰락하지 않았더라면 다윗이 득세하지 못했을 거란 얘기다. 세례자 요한은 나사렛 예수의 등장을 목격하고 그는 흥해야 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고 말했다는데(요한 3:26) 사울은 요한처럼 기꺼이 자기 자리를 내주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죽는 날까지 다윗을 한편으론 부러워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두려워했다. 다윗의 생애는 사울의 죽음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는데 두 사람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는 나중에 얘기하고 여기선 둘이 밀접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사울이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야훼는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걸 ‘후회’한다고 했다(사무엘상 15:11). 그가 헤렘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1장 참조). 사울은 사무엘의 옷자락을 잡고 매달렸지만 그걸로 야훼의 결심을 돌이키지는 못했다. 사무엘도 이 사태로 인해 괴로워했다니 야훼의 ‘후회’는 그에게도 반가운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훼는 괴로워하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한다. “야훼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사울이 다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내가 이미 그를 버렸는데 너는 언제까지 사울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냐? 너는 어서 뿔병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길을 떠나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거라. 내가 이미 그의 아들 가운데서 왕이 될 사람을 한 명 골라 놓았다’”(사무엘상 16:1).

 

이게 무슨 말인가? 사울이 버젓이 왕좌에 앉아 있는데 야훼는 차기 대권을 거머쥘 사람을 점지해놨다는 말 아닌가. 그러니까 사무엘은 아무도 모르게(!), 특히 사울이 모르게 야훼가 점지해놓은 사람에게 가서 그에게 기름을 부어 그를 왕으로 세우란 얘기다. 여기서 야훼에게 묻고 싶다. 왜 이렇게 했는가 하고 말이다. 왜 야훼는 먼저 사울을 왕좌에서 끌어내인 다음에 다윗을 즉위시키지 않았을까? 그게 더 자연스럽고 무리없는 방법이었을 텐데 말이다. 사울이 왕좌에 앉아 있는데 비밀리에 다윗을 왕으로 세우면 둘이 싸울 건 안 봐도 뻔한데 왜 그랬을까? 사울을 폐위하고 다윗을 옹립하겠다는 결정은 야훼와 사무엘 사이에 지극히 사적으로 정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그걸 모르는 사람들 눈엔 다윗이 왕좌를 노리고 그가 쿠데타를 일으킨다고 여기지 않겠나 말이다. 왜 야훼는 이런 방법을 택했을까? 기회가 되면 왜 그랬는지 야훼에게 직접 묻고 싶은 정도다.

 

2.

 

사울 아닌 다른 사람을 왕으로 점지했다는 야훼의 말을 듣고 사무엘이 깜짝 놀라서(그런 말은 없지만 아마 그랬을 거다)사울이 이 소식을 들으면 나를 죽일 것입니다.”(사무엘상 16:2)라고 말한 것도 이 때문일 게다. 사울이 멀쩡히 왕좌에 앉아 있는데 다른 사람을 왕으로 삼는다는 얘긴 곧 쿠데타를 하겠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야훼의 입장에선 자기 의지가 모든 걸 좌우하니까 쿠데타니 뭐니 하는 게 무의미하겠지만 사람들 입장에선 어디 그런가, 이는 반역이고 쿠데타며 하극상이다. 야훼는 두려워하는 사무엘을 이해한다는 듯이 대비책을 주는데 그게 우릴 혼란스럽게 한다. 왜 그러냐고? 조금만 신경써서 읽으면 왠지 알 수 있다.

 

암소 한 마리를 끌고 가서 야훼에게 희생제사를 드리러 왔다고 말하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를 그 제사에 초청하라는 게 야훼가 준 대비책이었다(16:2-3). 뜬금없이 왠 희생제사? 물론 희생제사를 드릴 수는 있지만 그것도 이유와 목적이 있어야 하지 않나? 희생제사를 드리겠단 말을 누구에게 하라는 건지부터 분명치 않다.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하라는 얘기 같은데 왜 그들에게 그 얘길 하라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누가 물어봤나? 사무엘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베들레헴 주민이 아니라 사울과 그의 측근이 아닌가.

 

더 곤혹스런 점은 야훼가 사무엘더러 거짓말로 핑계를 대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야훼가 사무엘에게 거짓말하라고 시켰다! 희생제사 드리러 온 걸로 보이게 암소도 한 마리 끌고 가라고까지 했다. 반드시 속이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인다. 아다시피 사무엘이 거기 온 목적은 희생제사 드리는 게 아니라 다윗(사무엘은 아직 이 이름도 모르지만)에게 기름부어 그를 왕으로 세우는 거였다. 희생제사 운운한 건 명백히 사람을 속이는 짓이었다. 텍스트는 희생제사를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 분명히 말하지 않는 건 사실이다. 사무엘 일행이 제사를 드리러 갔다고도 말하고, 다윗을 데려 오기 전에는 제물을 바치지 않겠다고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했지만 제사를 드렸다고 확실히 말하지는 않는다. 11절에서 사무엘이 그(다윗)가 이 곳에 오기 전에는 제물을 바치지 않겠소.”라고 말했다고 새번역 성서는 번역했지만(11절)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가 여기 올 때까지 우리는 앉지 않을 것이오(we will not sit down until he comes here).”라고 해야 한다. 그러니 야훼가 거짓말하라고 시켰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고, 설사 제사를 드렸다고 해도 그건 핑계에 지나지 않았으니 거짓말하라고 시킨 거나 마찬가지다. 안 그런가?

 

십계명에서 “거짓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한 이는 다름아닌 야훼다. 여기서 ‘거짓증언’은 법정에서의 증언이나 맹세를 가리킨다지만 그렇다고 일상에서는 거짓말해도 된다는 얘긴 아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해도 비난받아 마땅한데 하물며 하느님이랴. 게다가 희생제사 드린다고 거짓말을 하라고 했으니…. 교회 다니기 전 초등학생 때 목사 아들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와 가끔 주일 아침에 남산 어린이회관에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그 친구는 교회 예배에 가지 않았다. 종일 어린이회관에서 놀고 저녁에 집에 오면 그 친구는 부모님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었다. 하지만 꾸중은 잠깐이고 즐겁게 노는 건 꽤 길었으니 부모님 꾸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는 내가 가잘 때마다 교회 빠지고 어린이회관에 갔다. 그땐 교회 안 다녀서 몰랐는데 나중에 내가 목사가 되고 부모가 되니 그때 친구 부모 맘을 얼마나 아팠을까 싶다. 그냥 거짓말도 그런데 희생제사를 드린다고 거짓말하라고 야훼가 시켰다니….

 

사무엘이 베들레헴에 도착하니 그곳 장로들이 나와서 ‘떨면서’ 그에게 좋은 일로 오시는 겁니까?”라고 물었단다(4절). 그들은 사무엘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그에게 적대감도 갖고 있는 걸로 느껴진다. 그들은 왜 사무엘이 두려웠고 적대감을 품고 있었을까? 좋은 일로 오는 것이냐는 질문은 또 뭔가 말이다. 마치 그가 올 때마다 좋지 않은 일이 생겼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성서 독자들에게 사무엘은 대체로 좋은 사람이요 신앙의 사람인데 그 시대엔 안 그랬나? 그는 나쁜 일을 몰고오는 두려운 사람이었을까? 사무엘이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척 궁금해지는데 텍스트는 이처럼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더 이상 말하지 않으니 우리로선 알 도리가 없다. 베들레헴 장로들은 사무엘이 여전히(!) 사울 편인지 궁금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겠다. 그가 여전히 사울 편이라면 유다 지파에 속한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은 두려웠을 수 있다. 유다 지파에게 사울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사울은 북 이스라엘에 속한 베냐민 지파에 속했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관계는 구약성서의 이상화된(idealized) 서술과 달리 남남이나 마찬가지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 편이 아니더라도 두렵긴 매 한가지다. ‘무슨 꿍꿍이를 감추고 왔을까?’ 싶었을 테니 말이다. 무슨 음모를 꾸미는데 우릴 끌어들이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말이다(Walter Brueggemann, David’s Truth, 26).

 

장로들의 질문에 그는 좋은 일로 왔다고 대답한 뒤 이새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제사를 드리러 갔다. 사무엘은 그 중 맏아들 엘리압을 보고 야훼가 기름 부어 왕으로 삼으려는 자가 그 아들임을 확신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야훼는 중심을 본다.”라고 말했다(7절). 그때는 ‘잘 생기면 모든 게 해결된다.’거나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요즘 세태가 먹히지 않았던가 보다. 사무엘은 머쓱해서 뒷통수를 긁었겠다.

 

이새의 일곱 아들이 다 사무엘 앞에 섰지만 야훼의 승인은 떨어지지 않았다. 남은 아들은 앙떼를 치러 들에 나가 있던 막내 다윗뿐이었다. 사무엘은 얼른 그를 불러오라고 지시한다. 그를 불러오기 전에는 앉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는 계속 서서 심사를 했나 보다. 드디어 그가 왔다. 그는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었다고 한다(12절). 앞에서 야훼는 엘리압을 두고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설화자는 그런 야훼의 맘을 모르는지 여전히 외모 타령이다.

 

준수한 겉모습과 큰 키’는 안 되고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은 괜찮았을까? 키는 상관없고 얼굴빛과 눈만 좋으면 됐을까? 그건 아니었을 거다. 야훼는 ‘중심’을 본다지 않았나! 여기서 ‘중심’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마음’ 또는 ‘심장’(heart)을 가리키는 ‘레바브’다. 히브리인들에게 ‘레브’ 또는 ‘레바브’는 감정 뿐 아니라 지성과 의지 모두의 자리로 여겨졌다(한스 발터 볼프, 문희석 역, 《구약성서의 인간학), 82-116). 그러니까 야훼는 사람의 외모를 보는 게 아니라 정신을 들여다본다는 얘기가 되겠다. 이런 야훼의 의지에 사무엘이 얼마나 공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좌우간 그는 홍안의 소년이요 마음/심장을 야훼에게 내보인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다. 형들이 둘러서서 이를 목격하는 가운데 말이다. 그때 이후로 야훼의 영이 계속 다윗을 감동시켰다”고 한다(13절, 새번역). ‘감동시켰다’라는 행위동사보다는 공동번역의 ‘머물렀다’라는 상태동사가 더 적합해 보인다.

 

3.

 

야훼의 영이 사울에게서 다윗에게로 옮겨갔을까? 바로 다음에 야훼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야훼가 보낸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열왕기상 22장을 보면 미가야 예언자가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에게 자기가 본 비전을 얘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야훼가 하늘 군대에 둘러싸인 가운데 누가 아합을 꾀어내어서 그로 길로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고 묻자 한 영(a spirit)이 나서서 자기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예언자들 입에 들어가 그들로 거짓말을 하게 해서 아합을 꾀어내겠다고 말한다. 야훼가 이에 동의하여(여기서도 야훼는 거짓말을 방조한다!) 그를 보냈단다. 이런 미가야의 말을 듣고 시드기야라는 자가 그의 뺨을 치면서 야훼의 영이 어떻게 나를 떠나 네게로 건너가서 말씀하시더냐?”라고 조롱했다(18-28절). 여기서 아합이 죽음으로써 미가야가 참 예언자로 밝혀지고 시드기야는 거짓 예언자로 판명된다. 시드기야의 메시지에 귀기울일 이유는 없지만 그의 생각은 흥미롭다. 야훼의 영이 한 사람에게 머물러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갈 수 있다는 대목 말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사울과 다윗에게도 일어난 모양이다. 야훼의 영은 사울을 떠나 다윗에게 옮겨갔다. 그 빈자리를 ‘야훼가 보낸 악한 영’이 채웠는데 이 영은 사울 생전에 내개 그를 괴롭힌다. 이로써 사울이 저지른 ‘악행’의 책임소재가 모호해진다. 모든 게 야훼가 보낸 악한 영 때문이니 말이다.

 

 

 


<"Saul and David, by Rembrandt", Wikimedia Commons.>

 

사울이 악한 영 때문에 괴로워하자 신하들은 수금 잘 타는 사람을 들여서 악한 영이 왕을 덮칠 때마다 수금을 타게 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한다. 근래 들어 널리 활용되는 ‘음악치료’(music therapy)를 그 옛날에도 시행했던 걸까? 그건 아닌 것이, 그 시대에 음악은 단순히 오락이나 즐거움을 얻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음악에 주술적(magic) 기능이 있다고 믿었다. 음악에는 주술적인 힘, 곧 악한 영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고 믿어졌던 거다(Robrt Anderson, “Music and Dance in Pharaonic Egypt,” in Jack M. Sasson et.al.ed.,Civilizations of the Ancient Near East [New York: Schribner, 1995], 2555-2568; Margaret Cool Root, “Music and Dance in Western Asia,” Ibid., 2615-2638). 사울은 단순히 불면증이나 신경쇠약에 시달렸던 게 아니다. 그런 증상이 나타났다고 해도 원인은 악한 영에 있다고 믿었던 거다. 수금 타는 사람으로 궁전에 들어온 다윗이 해야 했던 일은 신경 안정이 아니라 악령을 쫓아내는 주술사 역할이었다.

 

고대 중동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막론하고 주술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주술사가 됐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은 신내림 받은 무당처럼 타고난 주술사였을까? 그렇지 않다. 고대 중동의 주술사는 교육을 통해서 양성됐다.(J. F. Borghout, “Witchcraft, Magic, and Divination in Ancient Egypt,” in Jack M. Sasson et. al. ed., Ibid., 1775-1786; Walter Faber, “Witchcraft, Magic, and Divination in Ancient Mesopotamia,” Ibid., 1895-1910). 주술의 일종으로 수금을 타는 것도 마찬가지다. 수금 타는 것도 배웠고 수금 타며 악령을 내쫓는 일도 배웠다. 다윗도 그랬을 개연성이 크다. 그냥 수금 타는 데 소질이 있었던 게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궁금해지는 건 다윗이 언제, 어디서, 왜 주술로서 수금 타는 법을 배웠는가 하는 점이다. 구약성서 어디에도 이 궁금증을 풀 실마리가 없다. 그래서 구약성서 이야기의 역사성(historicity)에 회의적인 학자들은 악사로서의 다윗은 역사성이 약하다고 본다.

 

다윗이 수금 타고 노래했다는 데서 시편 대부분이 다윗의 작품이란 전통이 생겼다. 히브리어 구약성서(‘맛소라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의 시편 가운데는 일흔세 편에 다윗 이름이 붙어 있는데 반해 그리스어 구약성서(칠십인역, LXX)에는 여든다섯 편이 그렇다. 칠십인역 성서가 만들어졌던 기원후 1세기까지도 각 시편 저자에 대한 견해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히 ‘다윗의 시’라고 번역된 말의 히브리 원문은 ‘르 다빗’인데 히브리어 ‘르’는 ‘~에게’ ‘~위하여’ ‘~에 관하여’ ‘~에 속한’ 등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다윗의 시편’이라는 말은 ‘다윗에게’ ‘다윗을 위하여’ ‘다윗에 관하여’ 등으로 이해될 수 있겠다. 이들 중에는 다윗의 생애에 일어난 특정 사건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는 시편도 있다. ‘다윗의 시’(르 다빗)라는 표제 다음에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뒤에 예언자 나단이 그를 찾아왔을 때에 뉘우치고 지은 시”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시편 51편이 대표적이다.

 

학자들은 다윗이 시편의 저자라는 전통은 그를 제의(ritual)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로 묘사하는 역대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본다. 실제 다윗이 음악에 대단한 소질이 있어서 시편들을 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구약성서에서 보이라면 마땅히 보일 게 없다. 그가 수금 타는 사람으로 궁전에 채용됐다는 얘기에도 의심스런 점이 있고 시편이 다윗의 저작이란 주장도 지금은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한다. 확실한 점은 그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상태가 별로 호전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긴 사울을 그렇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다윗인데 그가 어떻게 사울을 고치겠나.

 

한편 다윗이 ‘전사’(warrior)로서 역사 무대에 등장했다는 얘기는 ‘악사’(musician) 얘기보다는 역사적 신빙성이 높다고 말들 한다. 그는 악사였나, 전사였나? 아니면 둘 다였나?

 

수금을 타는 자가 도움이 되리라는 조언을 듣고 사울은 신하들에게 그런 사람을 찾으라고 명령했다. 이에 한 신하가 베들레헴의 이새에게 그런 아들이 있다면서 그를 “수금을 잘 탈 뿐만 아니라 용사이며 용감한 군인이며 말도 잘하고 외모도 좋은 사람인데다가 야훼께서 그와 함께 계십니다.”(16:18)라고 소개했다. 수금 잘 타는 것과 용사나 용감한 군인이라는 것, 그리고 말 잘 하고 외모가 좋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다. 직접 모른다 해도 세간의 평판에 근거해서 판단할 수 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야훼께서 그와 함께 계시는 것’이야 그가 어떻게 알겠는가. 이 점은 역사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는 신학적 진술이다. 여기엔 설화자의 생각이 드러나 있다고 봐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나 보다. 위의 여섯 가지는 앞으로 다윗의 생애에 나름 역할을 할 특성들이다. 그는 수금 타는 재주로 사울의 측근이 되어 권력에 다가갔고, 전쟁에 나가서 혁혁한 공로를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인기를 누렸다. 그뿐인가, 그는 말도 잘 해서 외교로 대외문제를 풀기도 했다. 게다가 그가 백성의 인기를 독차지한 데는 전쟁에서의 공로뿐 아니라 “눈이 아름답고 외모도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란 점도 역할을 했으리라. 음악도 잘 하면서 싸움도 잘 하는 사람은 드문데 그가 그랬던가 보다. ‘용사’와 ‘용감한 군인’은 비슷한 말인데 왜 반복했는지 모르겠다. 그 정도로 싸움을 잘 했다는 뜻일까? 하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이겠나, 결정적인 것은 ‘야훼가 그와 함께 했다’는 사실일 테니 말이다. 다윗 얘기를 읽어가면서 차차 분명해지겠지만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만날 때 ‘야훼가 그와 함께 했다’는 게 그것들을 푸는 열쇠인 경우가 많다. 솔직히 말하면 그럴 때마다 ‘짜증’이 난다. 그게 정말 답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야훼가 그와 함께 했다면 거기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가 ‘야훼의 마음에 합한 자’였다면 왜 그런지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말이다. 그걸 찾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못해 나중엔 ‘짜증’이 난다는 얘기다.

 

그는 우여곡절 끝에 왕궁에 채용됐는데 가서 보니 사울이 그를 맘에 들어 했고 심지어 ‘사랑’하게 되어(히브리어로 ‘아하브’란 동사가 쓰였다) 그에게 자기 무기를 들고 다니는 중책을 맡겼다고 했다. 그 후 사울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사람을 보내서 그가 자기 맘에 드니 자기 시중을 들게 하겠다고 전했단다. ‘인턴’ 기간 동안 일을 잘 해서 ‘정규직’으로 채용된 셈이라 할까….

 

다윗 하면 ‘목자’(shepard), ‘목자’ 하면 당연히 다윗이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무엘이 그를 찾았을 때와 사울이 사람을 보냈을 때 모두 그는 양떼를 치고 있었다(15:11, 19). 그래서 그는 목자라는 건데, 이새의 막내아들로서 미혼인 그는 부모에게서 독립하지 않았으니 직업이 목자였다기보다는 아버지의 분부를 받아 양떼를 쳤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런데 ‘목자’ 하면 다윗을 떠올리는 이유가 이것만은 아니다. 결정적인 건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로 시작되는 시편 23편이 다윗의 시편이라는 데 있다. 다윗 얘기에서 목자에 대한 언급은 사무엘상 16장 11절과 19절, 17장 15절, 28절, 34절, 40절, 그리고 사무엘하 5장 2절과 7장 8절 등에 등장하고 이 모두 다윗을 가리키긴 하지만 말이다.

 

다윗을 ‘목자’라고 부른다고 문제될 건 없다. 목자 노릇을 하긴 했으니까. 그런데 구약성서에서 ‘목자’라는 말에는 단순히 양떼를 치는 직업 이상의 의미, 곧 ‘지도자’ 또는 ‘영도자’나 ‘왕’이란 상징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학자들이 다윗의 직업이 목자라는 데 의문을 품거나 양떼를 치는 사람이란 의미 이상을 끌어내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곧 그가 목자였다는 데는 그 이상의 내용이 들어 있다는 거다. 그런 뜻에서 사무엘하 5장 2절은 인용할 만하다. 거기서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자들이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와서 자기들의 왕이 되어 달라면서 이렇게 말한다. “야훼께서 ‘네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될 것이며 네가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실 때에도 바로 임금님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목자는 명백히 왕을 가리킨다.

 

구약성서에서 ‘목자’가 ‘지도자’ 또는 ‘왕’을 가리키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제 역할을 못한 목자/지도자/왕을 심판하는 에스겔 34장이 그렇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여라. 너는 그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여라. ‘나 야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만을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사람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살진 양을 잡아 기름진 것을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기는 하면서도 양떼를 먹이지는 않았다. 너희는 약한 양들을 튼튼하게 키워 주지 않았으며 병든 것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다리가 부러지고 상한 것을 싸매어 주지 않았으며 흩어진 것을 모으지 않았으며 잃어버린 것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양 떼를 강압과 폭력으로 다스렸다. 목자가 없기 때문에 양떼가 흩어져서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1-5절).

 

여기서 명백히 목자는 지도자나 왕을, 양떼는 백성을 가리킨다. 곧 목자와 양은 은유적 표현인데 이와 비슷한 표현이 미가 5장 2-3절과 스가랴 13장에도 등장한다.

 

4.

 

사무엘상 16장에 전해지는 얘기에는 찾아야 할 몇 개의 퍼즐 조각이 있다. 우선 사무엘은 야훼가 사울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했는데 그 이유가 뭔지 분명치 않다. 자기는 늙었지 자식들은 제멋대로지 제 손으로 왕으로 세운 사울과는 권력투쟁 중이지, 게다가 그렇게 세운 사울을 버려야 하는 처지였기에 괴로웠을까? 아쉽게도 이 퍼즐 조각은 결국 찾지 못했다.

 

다윗은 이렇게 세상이 등장했다. 베들레헴에 살던 이새의 막내 여덟 번째 아들(역대기에는 일곱 번째 아들로 되어 있다)로서 들에서 양떼를 치다가 사무엘에게 불려가서 영문도 모른채 슬그러미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후 사울 왕의 부름을 받아 주술가로서 수금 타면서 악한 영에 시달리던 사울을 돕는 직책을 맡아 세상에 등장했던 거다.

 

다윗이 수금 타는 악사로 사울의 궁전에 들어온 것은 그가 악한 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곧 그는 불면이나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울에게 잠을 부르는 수면제같이 부드러운 음악을 연주하러 궁전에 들어온 게 아니다. 그는 수금 타는 주술사로서 악령을 몰아내는 미션을 갖고 들어온 거였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나! 야훼의 영이 떠나고 빈자리를 채운 악한 영(역시 야훼가 보낸)과 싸우기 위해서 야훼의 영을 새로 받은 다윗을 사울이 채용했다니 말이다. 사울이 왜 다윗을 그토록 좋아했고 ‘사랑’하기까지 했는지 이로써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겠다. 그에겐 야훼의 영이 머물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야훼가 ‘중심(심장)을 보고’ 선택한 다윗, 야훼의 영이 머물던 다윗과 역시 야훼가 사울에게 보낸 악한 영과 싸우는 새로운 문제가 생기지만 말이다. 야훼의 영끼리 싸우는 상황, 이상하지 않은가?

 

전사로서 다윗에 대한 얘기는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시작되므로 그 퍼즐조각 찾는 일은 다음 장의 과제가 되겠다.

 

곽건용/LA 향린교회 목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