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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종호의 '너른마당'

갈 길 잃은 내면화된 영성의 탐욕

by 한종호 2015. 2. 25.

한종호의 너른 마당(11)

갈 길 잃은 내면화된 영성의 탐욕

 

오늘날 우리사회는 “정신적 권위”를 가지지 못한 지경에 처했다. 원로의 존재만 생각해봐도 예전 같지 않다. 세월호 침몰 참사로 인해 한국사회가 난마처럼 얽히고 여전히 진상 규명의 실마리조차 풀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귀 기울여 경청할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뭔가 혼란스럽고 문제가 충격적으로 터지면 이걸 중심잡고 수습해줄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힘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런 현실은 우리사회가 위기에 직면할 경우 대단히 위태로워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종교가 그런 상황을 이겨내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리어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판국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답을 생각해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어떤 종교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종교 전반에 걸쳐 우리사회가 고뇌하고 있는 문제를 끌어안고 성찰하고 그에 따른 실천을 해나가지 않은 결과이다. 일종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긴 종교조차 오늘의 현실과 함께 그 정신적 원칙과 기초가 무너져가고 있다고 생각되니 그런 종교에 기대를 걸기 어려운 것은 자명하다.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이런 비판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적용되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편에 서는 일, 권력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저항하는 용기를 발휘하는 일 등은 종교의 역할에 대한 기대와 갈채를 받는다. 그러나 그건 대체로 소수에 속하는 이들의 자기희생적 선택에 따른 성취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이들은 자기 종교의 내부에서도 소수파요, 주변부적 존재가 되는 것을 감수하고 있다. 아니 다수가 이들과 함께 하기를 주저하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서 종교는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가치에 대한 절실함이 날로 떨어지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외면당하고, 그런 과정에서 역사적 현실과 맞물리면서 자기성찰적 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의 경우에도 사회적 역할에 대한 요구를 나름으로 반영하면서 역사 속에 파고드는 경우가 극히 소수다. 이러다보니 일부 불교계 인사의 정치사회적 의사 표현은 단지 시사문제로 취급될 뿐 그 안에 담겨있는 본질적 문제제기나 성찰의 차원은 경시되기 일쑤다. 종교가 인간사 전반에 걸쳐 발언하는 것은 마땅한데도 종교의 영역을 특수화하거나 경계선을 그어 종교를 단지 내면적 활동에 그치도록 만들려는 시도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종교의 상황은 그 종교가 기득권화되어 있고 그걸 지켜내고 확대하는 것에 일차적 관심을 쏟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현실의 권력과 결탁하고 보수적 입지에서 물러서기 어렵게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에서 현실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성찰,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함, 대중의 욕망에 대한 단호한 질타, 이 사회의 주변부적 인생에 대한 깊은 끌어안음, 이들을 내치는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작업 등은 실행하기 어렵고 자기 내부에 윤리적 기반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고 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돌아봐도 이 문제는 자명해진다. 중세 서구 기독교가 본래의 원시적 기독교의 탈 기득권적이고 민중적인 기반과 분리된 채 거대한 권력기구로 변질되면서 우리는 종교의 본질이 어떻게 소멸되고 말았는지 알고 있다. 그런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정치권력이자 사회경제적 이익집단의 위치를 유지, 확대하는 것에 우선적 목표를 둘 수밖에 없다. 결국 종교는 기득권을 움켜쥐는 과정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종교의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이런 현실은 동일하다. 자본주의 사회내부에 기본적인 계급갈등이 존재하고 이기적 욕망이 그 사회를 움직이는 원리로 정당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적 성찰을 돕기보다는 이런 사회에서 주도권을 잡는 길에 대해 역점을 두려는 모습은 종교의 역할을 포기한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의 경우를 봐도 한국 종교는 특히 지난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 하면서 물질적 성공을 그 신앙적 척도로 삼는 자세를 보여 왔다. 사람들의 머릿속을 돈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채우기 시작한 이 시대의 물신(物神)은 그래서 지금 흉험하게 미소 짓고 있다. 그 후유증이 신앙의 걸림돌로 곳곳에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형국이다.

종교가 이러한 모습이 된 데에는 욕망으로서의 종교로 치닫게 만든 종교서적의 출판이 한몫을 담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도 종교 서적의 경우, 자신의 내면을 위해 선택하는 무수한 책들이 있고 이런 책들이 많이 팔리기도 한다. 그러나 지성과 성찰이 없는 신앙은 뿌리가 깊지 않아 바람에 흔들리게 된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신앙인들에게 지성과 성찰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지식과 인문학적 소양, 사회적 담론, 신앙적 논의가 깊고 풍부한 울림을 가지지 못한 채 성장해나가는 것은 종교 전체의 장래를 위해서 우려되는 일이다.

 

 

한 때 그토록 뜨겁게 읽혔던 차동엽 신부의 《무지개 원리》와 조엘 오스틴의 연작, 《긍정의 힘》과 《잘 되는 나》는 긍정을 탐닉하려는 욕망으로 성공을 부추겼고 자기계발이나 처세 같은 장르가 가톨릭과 기독교 출판의 영역에서 거리낌 없이 유통되었다. 불교출판도 예외는 아니다. 법륜 스님의 《인생수업》, 《스님의 주례사》와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수백만 부가 팔려 나갔다. 지난 몇 년 동안 외부 환경이 급변하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명상 서적과 ‘힐링’을 주제로 한 유행이 트렌드가 된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보자면, 종교서적의 출판 경향은 힐링, 성공, 꿈, 명상 등 개인의 내면화된 영성에 집착하면서 영성과 역사, 영성과 현실이 조우(遭遇)하는 작업에 소홀히 해왔다. 아니, 소홀히 해왔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시했고, 이 작업에 반대해 왔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역사의 문제를 제기하고,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영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도외시했다. 심지어는 영성이 흐려지는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종교인들이 이러한 류의 서적에 물들어 있다 보니 종교가 우리 사회 전체가 영적으로 타락하고, 죄에 무뎌지며 교만과 거짓된 풍요로 비대해져가고 있는 것을 막아내지 못했다. 역사의 무수한 사건을 외면했으며 그러한 일들을 방치하는 것이 한 개인의 실존적 인생관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자기희생과 정의에 대한 헌신적 태도가 보이지 않는 종교란 시간이 갈수록 자기탐욕에 빠지기 쉽고 이 사회의 주변부에서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현실권력과 동격에 놓이는 것처럼 착각해서 현실에 비판적인 시선이나 목소리를 적대시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주도세력의 입장에서는 이런 종교야말로 동맹세력이자 없어서는 아니 될 이데올로기 창출자다. 그런 까닭에 종교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은폐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작동의 한 기구가 되고 만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일체의 모순은 역사와 현실에 대하여 바로 마주하지 않는 종교에서 비롯되는 것도 적지 않다. 역사가 잘못 갈 때, 현실이 모순을 그대로 지속하려 들 때, 그것이 한 개인의 실존에 어떤 고통을 주고 있는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세월호 참사에서 그대로 목격하고 있다. 이제 종교서적도 개인적 고뇌가 어떤 사회적, 역사적 현실과 관련이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하고 평화와 생명, 환경, 인권, 통일, 사회적 소수자 권리 등 사회 전체가 만들어가야 할 가치와 방향들과 관련된 출판에 더 주력해야 하지 않을까.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종교의 고대적 발상의 밑바닥에 생명과 평화, 사랑과 연대가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고 있다고 갈파한다.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대한 권력자들의 핍박과 착취는 절대자 또는 자연의 원리, 내지는 종교적 영성의 기준과 철저하게 대립하며, 이런 현실과 격렬하게 쟁투하는 것이야 말로 축의 시대가 이후의 역사에 남긴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특히 구약성서 아모스와 호세아, 예레미야 등 예언자의 불의에 대한 질타와 경고는 종교가 현실의 구조적 죄악에 어떻게 맞서 싸웠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무수한 종교적 기득권이 도리어 이와 같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탄압하고 침묵시키는 것은 축의 시대가 일구어낸 종교 본래의 가치를 허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카렌 암스트롱이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전란과 재앙 그리고 그 와중에 겪게 되는 혼돈과 멸망, 그리고 고통의 연속으로 인한 절망에서 피어난 정신사의 가르침이다. 춘추전국시대가 낳은 도덕적 깨달음, 제국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참담한 시절의 성찰 같은 것들은 모두 고난과 고통의 경험이 가져다 준 새로운 정신세계의 각성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과 하나의 마음이 되어 연대하고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체의 악과 마주해서 이겨나가려는 의지를 뿜어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축의 시대가 태어나게 한 정신의 교훈은 인간이 치르게 되는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고 이를 통해 서로 연민의 마음을 나누며,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 어떤 구별이나 경계선 또는 차별을 사라지게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지고,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되며 우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인류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이루어내는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인류사에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고 의미를 남긴 종교는 모두 기존질서의 부당함과 마주 싸우면서 새로운 길, 새로운 미래를 제시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의 포기와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나 핍박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면서 그 종교는 자신의 신념체계를 논리화하고 추종세력을 결집시켜가는 결과를 얻게 된다. 즉. 종교는 어떤 관념체계만을 구성해서 이를 포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과정이 축적되면서 그 종교의 진실과 실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는 종교의 신념체계와 종교의 역사적 실체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그것이 그 자체로서 종교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을 뜻한다. 종교의 발언과 행동, 지난 세월동안 그 종교가 역사 속에서 살아온 모습 이 모두가 서로 유리되지 않고 하나의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사회의 종교는 겉으로 표방하는 신앙과 그것이 역사적 현실 안에서 실재로 사는 내용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이것이 다름 아닌 종교의 위선과 기만적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 위에 쌓아올려지는 것은 아무리 화려해보여도 거짓이며 탐욕이다.

경제가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정치가 그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해주며 정신의학이 심리적 불안을 씻어주는데 종교는 그렇다면 이제 뭘 더 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일상적인 언어로 충분히 이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놓고 논의하고 종교가 아니더라고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이젠 종교의 자리란 소멸되고 마는 걸까? 이미 미국과 서구사회에서 종교를 가진 젊은 세대를 보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미래상을 앞당겨 보는 것일까?

종교인들에 대한 존경과 그걸 밑받침해서 한 사회의 현안을 슬기롭게 해결해 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이런 형편에서 보자면 어리석거나 순진한 발상이 된다. 종교가 또는 그에 속한 신앙인들이 그런 해결의 최전선에 서 있다기보다는 도리어 문제적 인간, 문제적 집단이 되는 경우가 훨씬 많아져가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종교 존재 자체가 의문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는 중인지 모른다.

다시 말해서, 차라리 이럴 바에야 종교의 탈을 벗고 본래 인간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편이 이 사회의 기만과 위선을 없앨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되지 않을까? 또는 굳이 종교라고 표방하지 않아도 종교적 메시지를 가진 발언이나 행동을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종교 전체가 우리 사회로부터 비난받을 까닭도 없고 종교성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본래 부여받은 역할을 제대로 해나가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인간의 내면 저 깊고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질문이거나 아무도 모르는 가운데 내적 투쟁을 거치고 있는 인간의 정신에 관계한 질문과 성찰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완전히 부인하기 어렵다. 아니 단지 그런 각도에서만이 아니라 각 종교가 당대 최고의 지적 성찰을 담고 있다는 차원에서도 종교의 무용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축적된 자산을 스스로 버리고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을 발견하는 것은 아무런 지도 없이 광야에서 홀로 헤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가 기독교에 대해 그리도 신랄하게 비판한 까닭도 다 이런 현실 때문이지 않겠는가? 이는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를 예고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존질서가 인간에게 가하는 무수한 압박과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해서 성찰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대로 가지 못하게 된다. 종교가 사라진 인류사회는 행복한 것이 아니라 정신의 중심에서 작동해야할 힘이 해체되어 기존질서가 가르치고 세뇌하는 욕망과 순응의 목소리에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종교란 사실상 인간 그 개인이나 그 어떤 사회도 자기정신의 주체성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 주인의 역할을 하고 주체적 모색을 하도록 해주는 거대한 가르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빠지면 출발선과 달리기의 자세 자체의 문제로 인간은 아무리 빨리 뛰어도 진정 목표로 할 것에 대한 성취가 힘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회가 어떤 정신적 깊이로 미래를 일구어 나갈 수 있을 것인지는 자명하지 않겠는가?

테리 이글턴이 그의 책 《신을 옹호하다》에서 결론적으로 말한 것은 바로 이 종교의 진정한 역할을 복구하는데 밀접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이때까지 자신이 누리던 바를 스스로 버리고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자기형성을 결단하면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고 했다. 이런 생각이 어디 단지 그만의 생각이겠는가?

한종호/<꽃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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