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180초

by 다니엘심 2015. 1. 1.

지강유철의 음악 정담(1)

 

180

 

광화문에 있는 예술전용극장 시네큐브에서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일입니다. 광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영화가 시작되더군요. 중학교 때 단체 관람으로 극장을 드나들기 시작한 후로 이제까지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는 걸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건 뭐지?” 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영화가 끝났을 때였습니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일어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대한민국에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나싶더군요. 영화 시작과 끝에 일어났던 이 두 차례의 경험은 그날 본 영화만큼이나 또렷하게 제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2010년 여름 스위스 루체른에 있는 문화컨벤션센터 콘서트홀에서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말러 교향곡 9번 연주가 있었습니다. 그 연주회에서도 좀처럼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저는 몰랐던 일이 있었습니다. 작곡가 자신의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짙게 드리워진 말러 교향곡 9번의 마지막 4악장은, 서서히 작아지다가 마침내 피아니시시모, 즉 가장 작은 소리로 끝납니다. 말러는 마지막 마디의 피아니시시모 옆에 죽어가듯이’(ersterbend)이란 악상기호를 붙여놓았습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는 연주가 끝났지만 3분 동안이나 손을 내리지 않고 정지해 있었습니다. 오케스트라 단원은 물론 관객도 숨소리 하나 크게 내지 못하고 지휘자를 기다렸습니다. 소리는 멈췄지만 3분이나 말러의 9번 교향곡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가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풍경과 지휘자가 아직 음악을 끝내지도 않았는데 과시하듯 박수를 쳐대는 일부 몰지각한 청중을 자주 목격했던 저로서는, 음악이 끝나고 10초나 30초도 아니고 3분 동안이나 콘서트홀에 소음 하나 없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였다면 아무리 연주가 압권이었더라도 관객이 1분이라도 지휘자를 기다려줄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클래식 음악의 본 고장이라고 하더라도 연주가 끝나고 3분 동안 콘서트홀이 정적에 휩싸이는 일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에게나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날 현장에서 아바도 지휘의 말러 9번 교향곡을 들었던 사람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 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숨 막히는 감동을 전해 준 사람은 영국 클래식 음악 평론가이자 얼마 전 번역된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의 저자 톰 서비스입니다. 그는 클래식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할 우리 시대의 거장인 발레기 게르기예프, 마리스 얀손스, 조너선 노트, 사이먼 래틀, 이반 피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여러 번 참관하고 이 책을 썼습니다. 전공을 하진 않았지만 톰 서비스는 브루크너의 9번 교향곡을 실제 지휘한 경력이 있습니다. 오케스트라와 지휘에 대해 이론과 실기를 겸한 평론가란 얘깁니다. 이 말을 하고 나니 우리 음악계에 대해 한마디 거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스포츠 평론을 하는 사람이 경기 룰을 모른다는 걸 상상할 수 없다면 음악 평론가 역시 그러해야 옳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음악평론가로 활동하는 사람들 중에 악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기준이 내 취향일 뿐인 평론가가 넘쳐난다는 얘깁니다. 톰 서비스의 이 책에 무게가 실리고 믿음이 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바쁜 탓도 있었지만 화장실에 갈 때만 야금야금 이 책을 읽었습니다.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이 보통 사람에겐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우리 시대 거장들의 리허설 현장을 직접 본 사람의 이야기이고, 저자가 선정한 지휘자들이 하나 같이 좋은 연주자들이어서 너무 흥미진진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일에는 머뭇거리게 됩니다. 저자가 주 독자층으로 상정하는 이들이 클래식 음악과 친해지려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 그 이유입니다. 클래식과 이미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나 흥미 있을 무대 뒷이야기이거든요. 따라서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되 좀 더 깊고 짜릿한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의 선택에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의 음악적 취향과 클래식 이해의 깊이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

 

이 책은 음악을 듣는 즐거움 뿐 아니라 보는 즐거움과 읽는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줍니다. 당신이 거기서 거기인 클래식 음악 에세이에 식상했다면 이 책이 어느 정도 대안이 될 것입니다.

 

지강유철/양화진문화원 선임연구원, 장기려, 그 사람저자

'지강유철의 '음악정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악보에 머리를 처박지 말고”  (0) 2015.02.02
연주자들의 공공의 적, 암보  (0) 2015.01.29
나만의 명품  (1) 2015.01.22
잡음  (0) 2015.01.13
미안, 슈베르트  (0) 2015.01.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