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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건용의 '짭쪼름한 구약 이야기'/시편과 영화의 만남

노래하는 이유, 찬양하는 까닭

by 한종호 2018. 7. 20.

시편과 영화의 만남 1


노래하는 이유, 찬양하는 까닭

시편 145:1-13


“나의 임금님이신 하나님, 내가 주님을 높이며 주님의 이름을 영원토록 송축하렵니다. 내가 날마다 주님을 송축하며 영원토록 주님의 이름을 송축하렵니다. 주님은 위대하시니 그지없이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 위대하심은 측량할 길이 없다. 주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대대로 칭송하고 주님의 위대한 행적을 세세에 선포하렵니다. 주님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과 주님의 놀라운 기적을 내가 가슴 깊이 새기렵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두려운 권능을 말하며 나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선포하렵니다. 사람들은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주님의 의를 노래할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다. 주님은 모든 만물을 은혜로 맞아 주시며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게 긍휼을 베푸신다. 주님, 주님께서 지으신 모든 피조물이 주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며 주님의 성도들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님의 위대하신 행적을 말하는 것은 주님의 위대하신 위엄과 주님의 나라의 찬란한 영광을 사람들에게 알리려 함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며 주님의 다스리심은 영원무궁 합니다”(시편 145:1-13).


하느님은 창조 전엔 뭘 하셨을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을까요? 저는 이런 게 궁금할 때가 있는데 여러분은 안 그렇습니까? 요즘은 이럴 때 다들 구글(google)을 검색하지요. 그래서 저도 해봤는데 실망했습니다. 구글은 성서 이곳저곳을 인용하는 것 외에 별다른 답을 주지 않더군요. 그것들은 구글이 내린 대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대답을 구글이 모아놓은 것이지만 말입니다. 예컨대 요한복음 1장 첫 구절,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말씀’(Logos)인 예수님이 천지창조 이전에도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글을 소개하더군요. 또 창세기 1장 첫 구절,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를 인용하면서 ‘하느님의 영’은 신약성서의 ‘성령’과 같다면서 창조 이전에 하느님은 성령과 함께 계셨다는 등의 답이 고작이었습니다. 창세기 1장의 ‘하느님의 영’(루하흐 엘로힘)을 보혜사 성령과 동일시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해석입니다. 구글이 인용한 두 구절을 합치면 삼위일체가 되어 성부 하느님은 성자 예수님(로고스), 성령 하느님(하느님의 영)과 함께 계셨다는 얘기가 됩니다. 제 질문은 창조 이전에 하느님이 ‘누구와 함께’ 계셨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인데 그에 대해서 구글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구글이 모르는 것도 있네요.


유대인들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답니다. 한 아이가 랍비에게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에 뭘 하고 계셨어요?”라는, 제가 가진 것과 똑같은 물음을 했더니 랍비는 “너 같이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녀석 맴매하려고 회초리를 만들고 계셨단다.”라고 대답했답니다. 아이의 물음에 성의껏 대답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교육적이지만 이것은 단순한 농담은 아니고 ‘나름의’ 신학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이들이 쓸데없는 상상이나 추측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읽지 못하게 하는 성서구절들이 있는데 창세기 1장 1절도 그 중 하나라고 합니다. 오래 전에 그 명단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 외에 에스겔의 여러 구절이 거기 포함된다고 기억합니다. 그 구절들을 못 읽게 한다는 말은 공식적인 예배 때 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개인적으로 읽는 것이야 막을 수 없지요. 금지하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니 개인적으로는 더 많이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성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를 말하는가?


흔히 성서가 말하는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n out of nothing, 라틴어로 creatio ex nihilo)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이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겁니다.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성서가 정말 그것을 말하는지는 의문입니다.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이들은 창세기 첫 장 첫 절만 봐도 성서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님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욥이 “제가 왜 이렇게 정당하지 않은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라고 하느님께 따져 물었을 때 하느님은 욥에게 이렇게 반문하셨습니다. “네가 천지가 창조될 때 그 자리에 있었느냐?” 이렇게 물으면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창조 때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성서의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창조 때 아무도(nobody) 없었던 것은 맞지만 아무 것도(nothing) 없지는 않았습니다. 창세기 1장 첫 절에 나오는 ‘혼돈’ ‘공허’ ‘어둠’ ‘깊음’ 등의 말은 추상명사이니까 제쳐두더라도 ‘땅’과 ‘물’은 명백하게 물질명사입니다. 성서는 창조 때 “‘땅’이 혼돈하고… 하느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창조 이전에도 뭔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적어도 ‘땅’과 ‘물’은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성서의 창조를 ‘무로부터의 창조’라고 보는 데는 문제가 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무로부터의 창조 교리는 초대교부들이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내놓은 주장으로서 성서의 창조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믿어온 ‘무로부터의 창조’와 다른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있었습니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말하자면 일종의 ‘가르기’와 ‘질서 세우기’입니다. 창조 첫째 날에 하느님은 빛과 어둠을 나눴고 둘째 날에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눴으며 셋째 날에는 육지와 바다를 나눴고 넷째 날에는 낮과 밤을 나눴으며 다섯 째 날에는 동물들을 공중동물, 육지동물, 바다동물을 나누는 등, 창조는 혼돈스럽게 뒤섞여 있던 것들을 구별해서고 나누어 질서를 세워나가는 과정이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창조가 7일 만에 완성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조는 과거 어느 한 때에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 현재도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과정’이라는 겁니다. 세상은 과거에 완성된 채로 우리 앞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지금도 만들어져가는 중입니다. 오래 전 서울에 살 때 한 서점에 갔다가 제목을 보고 깜짝 놀라서 거금을 주고 구입한 책이 있습니다. 유럽 신학자 에버하르트 윙(Eberhard Jüngel)엘이란 분이 쓴 <God’s Being Is in Becoming>이란 책이 그것입니다. 번역하면 ‘하느님의 존재는 형성되는 중이다, 만들어지는 중이다’ 쯤이 되겠습니다.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책인데 성서가 말하는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라기보다는 ‘가르고 나눠서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서의 창조’라는 주장도 거기서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찬양’은 예배의 필수요소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레위기를 읽으면서 제사의식, 곧 예배의 중요성과 의미와 기능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희생제사에 관해 얘기했지만 예배에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 반드시 있어야 하는 요소는 ‘찬양’(讚揚, praise)입니다. 찬양의 역사는 예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됐습니다. 찬양이 없는 예배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에서 필수적입니다.


찬양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서, 문화적, 종교적 배경에 따라서 다릅니다. 주로 음악이 사용되지만 다른 예술형식도 사용됐습니다. 음악의 경우도 사람의 목소리뿐 아니라 다양한 악기들이 사용됐습니다. 때론 요란하고 열광적으로 찬양하기도 했지만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도 찬양했습니다. 침묵도 찬양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이렇듯 형식은 다양하지만 예배에서 찬양이 빠지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성서의 대표적인 찬양이 시편인데 무려 150편이나 되는 많은 시편이 있다는 사실은 예배에서 찬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본래 시편에는 가락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시편을 읽지 않고 노래합니다. 현란한 멜로디와 화려한 애드리브는 없고 음정의 높낮이 변화도 크지 않았지만 시편은 분명 노래, 곧 찬양입니다.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 사건을 경험한 후에 그에 대한 응답으로 부른 노래라고 주장한 학자는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다는 구약학자 게르하르트 폰 라트(Gerhard von Rad)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한 사람의 반응, 응답, 특별히 노래로 한 응답이 시편의 찬양이라는 겁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하느님이 구원사건을 벌일 때 이스라엘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그 일이 마무리된 후에 감사와 찬양의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는 겁니다. 하긴 히브리 노예들이 이집트를 탈출했을 때 그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파라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하느님이 내린 열 가지 재앙을 겪은 후에, 특히 모든 장자가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은 후에 비로소 히브리인들을 내보냅니다. 히브리 노예들은 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홍해가 갈라졌을 때도 두려워한 것 말고는 한 게 없었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을 때도 뿔 나팔 부는 사제들 뒤를 따라서 성 주위를 걸은 것 외에는 한 게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하느님이 일으킨 구원사건이 끝난 다음에 노래를 지어 하느님이 하신 놀라운 구원의 사건을 감사하며 찬양하며 축하했다는 것이 폰라트의 주장입니다.


그보다 약간 후대 학자인 크라우스 베스터만(Claus Westermann)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시편의 찬양은 단순히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반응하고 응답하는 감사의 노래에 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예배에서 했던 찬양은 과거 어느 때 벌어졌던 구원사건을 단순히 기억해서 되돌아보고 노래한 게 아닙니다. 하느님이 태초에 세상을 완성된 모습으로 창조하셨고 사람은 타자로서 그걸 향유하는데 그치는 게 아니라 하느님은 혼돈(카오스)을 갈라내고 질서를 세우심으로써 창조사역을 계속하고 계시고 사람은 거기에 파트너로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하느님의 구원사건에 대해서도 사람은 그것과 떨어져서 객체로 머물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동반자로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하고 다짐하고 실천하는 마당이 바로 예배이고 그 중에서도 찬양이라고 베스터만은 주장합니다. 찬양은 늘 변조되어왔고 편곡되어 왔습니다. 과거에 벌어졌던 하느님의 구원사건을 같은 가락과 같은 노랫말로 반복해서 부르는 게 아니라 변조된 가락과 노랫말로 편곡하고 개사해서 부름으로써 지금 여기 자신들의 얘기를 담아냈습니다. 그들은 찬양을 하면서 ‘다른 세상’을 꿈꾸고 봤고 경험했던 겁니다.


어거스트의 음악은 곧 찬양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태어난 줄도 몰랐고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는 중에 죽을 줄 알았습니다. 그 아이가 사실은 죽지 않고 누군가에게 입양됐다가 고아원으로 옮겨져 거기서 자랐습니다. 그는 나이 많은 원아들의 놀림을 받으며 자랐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자기를 데리러 올 거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부모가 자길 찾으러 오지 않자 그는 스스로 부모를 찾아 나섭니다. 이 아이는 보통사람 이상으로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고 그 소리들을 음악으로 들을 줄 아는 비상한 탤런트를 가졌습니다. 그는 음악이 자기를 부모에게 데려다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며 많은 소리들을 듣습니다. 우연히 만난 아이를 통해 몸을 의지하러 찾아간 곳이 하필 아이들을 거리로 내보내 ‘앵벌이’ 시키는 나쁜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어거스트는 거기서 자신이 천재적인 음악재질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그가 한 교회에 찾아든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하느님의 섭리 같은 것이었을까요, 그는 거기서 피부색 짙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습니다. 그 광경을 조금만 볼까요?


http://www.youtube.com/watch?v=8DwW0dCQHPQ


그가 줄리아드에 들어가고 곡을 만들어 공원에서 연주하고 그것을 통해서 부모를 만나는 줄거리는 전형적인 해피엔딩 스토리요 할리우드 스타일이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 봐도 감동적입니다.


긴 세월 교회생활을 하는 동안 제일 듣기 싫은 말은, 그래서 저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 말이 ‘준비찬송’ 또는 ‘준비찬양’이란 말입니다. 찬양은 뭔가를 준비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찬양은 예배의 메인이벤트를 하기 전에 하는 오픈게임처럼 벌이는 행사가 아닙니다. 찬양은 말씀을 듣기 전에 예배자의 감정을 달아오르게 하려고 벌이는 퍼포먼스도 아닙니다. 사람의 감정을 건드려서 무슨 말에든 ‘아멘!’ 하고 화답하게 만드는 수단도 아닙니다.


찬양은 꿈을 꾸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다른 세계를 꿈꾸는 행위입니다.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지금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심초사하신다고 믿고 그 일에 우리를 동반자로 부르셨다고 믿는 사람이 찬양합니다. 오랫동안 이 땅의 흑인노예들이 매를 맞아가면서 ‘우린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부른 것은 그 노래가 자기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고 고통을 잊게 만들어줬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 찬양을 부르면서 실제로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실현되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행진에 참여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니, 그 찬양을 부르면서 그들은 실제로 그 행진에 참여하여 그 대열 안에 있었습니다.


찬양은 세상을 바꾸는 역동적인 시(詩)


찬양은 지금 주어진 세상(status quo)은 별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산문’(散文)의 언어가 아닙니다. 찬양은 지금 나의 삶을 옴짝달싹 할 수 없는 운명이나 팔자로 받아들이고 입 다물고 사는 맥없는 산문의 언어가 아닙니다. 나는 내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 세상은 바뀔 수 있다, 하느님은 나와 세상을 지금 이대로가 아니라 바른 방향으로 바꾸시려 한다, 그 일을 하기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온 맘과 온 영혼과 온 몸을 바쳐 외치는 시(詩)적 언어입니다. 나의 삶은 내가 희망하는 대로 바뀔 수 있다, 나는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터뜨리는 살아 숨 쉬는, 역동적인 시적 언어입니다.





우리에게는 도덕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도 해결해야 합니다. 매일의 일상이 무겁기만 하고 그 안에서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위로의 말씀도 필요합니다. 그뿐인가요, 올바른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르침(교리)도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모두 ‘힐링’을 외치는데, 사실 한 주간 세상에서 부대끼면서 사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것도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 못지않게, 아니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것은 지금 현재 나의 삶을 더 낫게 바꾸겠다는 의지요 희망이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믿음입니다. 나와 내 후손이 살아갈 세상이 지금보다는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 하느님나라의 이상에 좀 더 다가가고, 외롭고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물질로나 정신, 영혼으로나 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희망, 그리고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입니다. 찬양할 때 그런 희망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찬양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노래이고 그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행위입니다. 찬양은 그 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과 기존질서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줍니다.


어린 어거스트 러쉬는 음악에서 그걸 봤습니다. 저는 그의 천재적 음악 재능이 그걸 보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구성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그의 천재적 재능은 부모를 빨리 만나게 하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궁극적으로 그가 부모를 만나게 된 것은 그의 음악에 담겨 있는 찬양의 힘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찬양시간에 때로는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아닌 이른바 ‘세속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걸 불편해 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심각하게 그에 대해 제게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찬양을 찬양으로 만드는 게 뭘까? 그냥 노래와 찬양은 뭐가 다를까? 예수님, 하느님, 믿음, 은총 등의 언어가 가사에 담겨 있는 노래는 다 찬양일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나라를 꿈꾸고 그걸 실현할 수 있다고 굳게 믿으며 굳어 있는 현실을 바꾸겠다는 믿음을 가장 적절한 멜로디와 노랫말로 표현하는 노래가 찬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찬양시간에 더욱 힘차게, 열정적으로 찬양합시다. 그냥 노래에 취해서 찬양하지 말고 내가, 우리가 이 찬양을 부르면서 새 술을 낡은 부대에서 새 부대로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찬양합시다. 그렇게 한다면, 저는 여러분께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생이 달라질 겁니다.


곽건용/LA향린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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